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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50면, 124동, 호구수는 1만 5,121호, 인구는 남자가 2만 8,240명, 여자가 2만 9,420명으로 총 5
만 7,660명으로 기재되어 있어 『수원부읍지』보다 약간 증가된 것이 확인된다. 이 차이는 현륭원 천봉
이후 신읍치를 조성하면서 광주유수부의 일용면과 송동면의 수원부로 이속한 것이 반영된 것으로 판
단된다. 12)
이때 팔달산 아래에 조성된 신읍치에는 부내를 남리(南里)와 북리(北里)로 나누었는데, 다른 면리
와 구분하여 행정 구역상 별개의 구역으로 관리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옛 수원부의 부내
였던 문수당의 1·3·5수[授=里에 해당]가 통합되어 문수당면(文殊堂面)이 되고, 6수가 시봉면으로
분리되고, 광주부의 일용, 송동 2개 면이 편입되어 면수가 증가된 것이 확인된다. 이전 수원부에 비
해 3개 면이 늘어나 모두 50개 면으로 행정구역의 확대되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정조 19년(1796) 화성 성역이 마무리되면서 수원부의 행정 체계도 완성되었다. 이후 19세기 중반
순조 31년(1831)에 편찬된 『화성지』에 의하면 수원부의 행정구역은 총 40면 440동, 전체 호구수는 1만
4,288호, 인구수는 남자가 3만 183명이고 여자가 2만 7,858명으로 총 5만 8,041명으로 기록되어 있
다. 다음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수원부의 총 호구수와 인구수를 정리
한 표이다
표 3. 18세기~19세기 수원부 행정구역의 변화
인구수[口]
면수 동수 호구수[戶]
남자 여자
『수원부읍지』 47 14,693 55,680
(신읍 이전) - 28,373 27,307
『호구총수』 50 15,121 57,660
(1789년) - 28,240 29,420
『화성지』 58,041
(1831년) 40 440 14,288 30,183 27,858
『수원군읍지』 40 449 12,579 49,708
(1899년) 27,632 22,076
수원부 인구는 신읍이 조성된 이후 점차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19세기 중반에 5만 8,041명을 기점
오산시사 으로 이후 감소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약 1만 명 정도가 줄어든 수치를 보인다. 수원부의
인구수와 호구수가 정확하게 기록된 것에 비해 수원부에 속해 있던 오산의 면과 호구수, 인구수는 기
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19세기 이후 육상 교통의 발달에 따라 사회적 인구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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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어지면서 수원부의 인구 변동과 마찬가지로 오산시에 속했던 면의 호구수와 인구수 역시 같은 형태
132 12) 『오산시사』 1, 제2편 역사, 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