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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도체계는 세종대와 세조대에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세종대에는 경기도에 8개의 역 135
도가 설치되었는데, 이중에서 오산과 관계되는 역은 경기좌도에 편입된 동화도(同化道) 관할이었다. 역사
수원에서 진위를 거쳐 안성으로 향하는 동화도는 장족(長足, 수원), 해문(海門, 남양), 청호(菁好, 진 / 유적
위), 가천(加川, 양성), 강복(康福, 안성), 동화(同化, 수원)의 6개 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동화도에
는 역을 관장하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6명이 배치되었는데, 6개의 역 가운데 오산지역에 해당하는 · 유물
역이 바로 청호역이었던 것이다.
세조 3년(1457)에는 한양 주변의 경기도와 강원·충청의 일부를 합속하여 6개의 역도 체계로 나누
었다. 이때 동화역 관할의 청호역은 경기충청우도정역(京畿忠淸右道程驛)에 속하게 되었다. 세조 6
년(1460)에는 경기와 하삼도의 거리에 따라 역도 체계가 다시 개편되어 수원부의 동화역·청호역·
장족역 등이 경기도 소속의 총 23개 역과 합하여 경기좌도로 편성되면서 찰방(察訪)이 업무를 맡아보
게 되었다. 이때 역도의 개편은 왕의 순시나 지역을 왕래하는 과객이나 찰방이 먼 거리를 왕래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도리상거(道里相距)에 의하여 재편성된 것이다. 17)
경기의 역도 체계는 여러 차례 개편을 거듭한 결과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정비되었다. 이때 오산
18)
지역에 해당하는 청호역은 양재도 에 속하여 한양-수원-진위-안성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로
19세기 말까지 운영되었다. 한양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육지 교통로의 역할에 따라 수원의 남부지
역이었던 오산 일대는 청호역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으로 인해 오산의 독산성을 거쳐 한양이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군사들의 이동길로 이용되면
서 정치적·군사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19)
청호역은 한양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노정이 시작되는 양재도의 중간 기착지였다. 청호
역 일대는 국왕이 온양온천을 다녀오는 행차 길에 수원과 진위의 중간지점으로 대가가 잠시 머물 수
있는 들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세종이 온행(溫行) 길에 오산원 들판에 머물렀던 것처럼, 현종 역시 온
20)
양으로 내려가던 중 청호 앞 들판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이외에도 청호촌(靑好村)은 숙종 44년
(1718) 희빈장씨의 무덤이 광주(廣州)의 진해촌(眞海村)으로 옮겨질 때 광주와 함께 천장지로 거론되
기도 하였다. 21)
22)
18세기 중반 청호역의 규모는 『여지도서』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청호역에는 대마(大馬) 2필, 복
마(卜馬) 3필 등 총 5필의 역마, 역노(驛奴) 7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당시 수원부 관할의 동화역은 대
마 1필, 복마 4필, 역노 8명이 배정되었고, 장족역(長足驛)은 대마 1필, 기마(騎馬) 2필, 복마 2필, 역
노 5명이 배정되어 운영되었다.
17) 조병노, 『한국근세 역제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5, 65쪽.
18) 양재도는 연원도·유곡도·김천도·성현도·황산도와 함께 영남대로의 6개 역도 중 하나로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노정의
시발점으로 인해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19) 『선조실록』 권67, 선조 28년 9월 3일(임신).
20) 『현종실록』 권12, 현종 7년 3월 28일(무신).
21) 『숙종실록』 권62, 숙종 44년 12월 23일(병인).
22) 『輿地圖書』 上, 「水原府邑誌」, 驛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