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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에 용인으로 진출하여 왜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당시 근왕병들은 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139
                  과 5일과 6일 이틀간 전개된 용인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용인전투는 남도 근왕병 5만 명이 용인의                                         역사

                  2,000여 명의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것 외에도 이후 근왕병들이 각자의 지역으로 흩어지는 결과를                                          /  유적
                  가져오게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삼남지방에서는 왜적과의 전투가 일어나는 지역마다 모두 패전을 당하면서 삼도의                                            · 유물
                  수신(帥臣)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이에 삼남 곳곳에서는 지방의 유림(儒林)을 중심으로 창의(倡

                  義)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의병으로 모인 삼도의 근왕병들은 한양으로 향하는 길에 오산의 독
                  산성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전쟁에 임하게 된 것이다. 비록 왜적과 싸워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백성들의 인심과 나라의 운명은 오직 의병의 힘으로 유지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32)


                  2) 김천일과 독산성

                    김천일이 독산성에 주둔하였던 시기는 선조 25년(1592) 경기 인근에서 왜군과 전투가 한창 진행 중

                  이던 6월부터 8월까지 약 두 달 정도였다. 김천일은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을 떠나고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고경명(高敬命, 1533~1592)·박광옥·정기·최경회 등에게 편지를 보내

                                            33)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이 가운데 고경명과는 5월 6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담양에서 만
                  나 의견을 나누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5월 16일에는 전라도 나주 일대에서 송제민(宋

                  齊民, 1549~1602) 등과 함께 고향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300여 명이 집
                  결하였고, 김천일의 뜻에 따라 의병을 조직하고 병기와 식량을 모아 결의를 다졌다.

                    김천일은 5월 26일 전라도 나주지역에서 추가로 병력을 모아 의병을 모집한 후 군대를 가다듬고 6
                                                     34)
                  월 3일 한양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김천일은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고경명의 의병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북상하였다. 또한 전라감사 이광이 관군을 소집하여
                  북상하였지만, 공주에서 해산시켜 버리자 이에 실망하여 고경명에게 편지를 보낸 후 한양을 향해 출

                  발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나주를 출발하여 북상하던 김천일의 의병군은 지나는 지역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고 있었다. 군

                  수물자의 지원은 물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에 가담함에 따라 사기가 높아 있었다. 그러나 전
                  라·충청·경상의 3도 근왕병이 용인에서 와키사카 아스하루[脇坂安治] 군대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대의 사기는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김천일은 부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우리 군은 의병이다. 관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들이 만일 나를 따르기 싫어한다면 어찌
                        강제로 내몰 수 있겠는가. 다만 왜적을 토벌하지 못한다면, 비록 이 땅의 어느 곳을 간들 살길

                        이 있겠는가! 하물며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들이 죽어 가는데, 그대들은 이 나라 200년 사직




                  32)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6월 1일(기축).
                  33) 김정우, 「健齋金千鎰의 學文과 義兵活動」,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24쪽.
                  34) 심승구. 위의 논문,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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