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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多秀家)가 파견한 장수가 이끈 왜병은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물을 한 지게 143
올려보내 조롱하였다. 권율 장군은 당장 말을 끌어다가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역사
보였다. 이에 왜군은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고 속아 퇴각했다는 설이 전해올 만큼 독산성의 가장 큰 / 유적
결점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율은 그의 기지와 산성 일대의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독산성 전투를 역사에 남게 하였다. · 유물
4) 독산성 전투의 영향
독산성 전투는 승패를 떠나, 산성 일대의 백성들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
엇보다도 독산성이 광주의 남한산성, 금천의 금지산(衿之山) 등과 함께 호남을 방어하는 요새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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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비록 전쟁기간이었지만, 선조 27년(1594) 9월 독
산성의 수축을 결정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유근(柳根, 1549~1627)이 수원부 백성들을 동원하여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4일 만에 성곽의 수축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때 성곽 수축 외에도 성내에는 곡
식을 저장하는 창고도 함께 설치되었다.
그러나 수축 이후 곧바로 산성에 군사가 배치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토적이 봉기하여 도적이 일
어나고, 관군을 격파하고 약탈하였으며 심지어 독산성에 숨어 지낸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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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조정에서는 10월 17일 독산성에 군사를 배치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시재(試才)를 베풀었다. 이
조치는 독산성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독산성 내에 거주할 유민을 모집하였다. 산성에 거주할 사람을 모집한 후 읍리에서 황무
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여 곡식을 저장하도록 하였다. 이때 농우(農牛)와 곡식의 종자[穀種]는
호조나 수원부에서 편의에 따라 지급하였다. 그리고 인원이 모이면 군사로 훈련시키는 것은 물론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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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덜어주고, 꾸준하게 성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산성의 유민 모집은 행주산성을 비롯한
다른 산성의 주민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외에도 전투가 끝난 뒤 독산성 주변에는 지형에 따라 일정거리에 결책(結柵)을 연달아 설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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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운영하였다. 이는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마을이 이루어지게 하는
조치로 경기의 다른 지역에도 결책이 설치되어 도로와 주요 지역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후 선조 28
년(1595)에는 독산성에 방어사를 두어 수원을 지키는 정병(精兵)을 주관하고 성곽의 시설물 관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47)
하지만 선조 29년(1596) 4월까지도 독산성의 방어사는 임명되지 않았다. 대신 독성장(禿城將)에 조
발(趙撥)을 임명하여 산성을 지키도록 하고, 독산성의 수축은 경기 방어사 변양걸(邊良傑)이 담당하
였다. 이에 수원부민들 가운데 성내에 들어가 가옥을 수리하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그
43) 『선조실록』 권43, 선조 26년 10월 22일(임인).
44) 『선조실록』 권56, 선조 27년 10월 17일(신유).
45) 심승구. 위의 논문, 143쪽.
46) 『선조실록』 권57, 27년 11월 27일(신축).
47) 『선조실록』 권67, 28년 9월 1일(경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