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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를 재건축하였다. 무덤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석재 또한 왕실 묘에 즐겨 사용되던 강화도 돌이
아니라 수원부 신읍과 멀지 않은 곳에서 떠오도록 하였다. 봉분에 사용되는 큰 돌을 떠내는 대부석소
54)
가 앵봉에 설치되었고, 기타 자잘한 석재를 취급하는 소부석소는 인근 여기산에 마련되었다. 당시
대부석소가 담당한 석재는 127개, 소부석소가 담당한 석물은 806개에 이른다. 부석소는 9월 5일까지
약 50일간 석재를 떠내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수석소에서는 1,000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혼유석 같
은 대형 석물은 썰매[雪馬]에 실어 원소까지 운송하고, 작은 석물은 수레나 담기(擔機)에 실어 수송하
였다.
운송된 석물들은 즉시 조각 작업에 들어갔다. 당대 최고의 석물 조각가인 별간역 정우태(丁遇泰,
?~1805)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우태를 비롯한 장인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석물은 9월 13일부터 10월
14일까지 31일 동안 봉분 주위에 배치되어 현륭원 조성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관을 안치하는 날 직
접 거동한 정조는 석물의 질과 빼어난 조각 수법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방대한 인원과 막대한 물력이 동원되었음에도 유기적인 행정 시스템으로
원활히 공역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건실한 문화적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륭원 조성 이후 공역 전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공사보고서인 『의궤』를 간행함으로써 투
명한 공사 진행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륭원이 완성된 이후에도 신원소를 관리하기 위한 다양
한 정책들이 계획되어 운영되었다.
현륭원 조성 이후, 정조는 정조 13년(1789)부터 정조 24년(1800)까지 11년간 총 13차례 수원에 행차
하였다. 무덤 조성공사가 마무리되고 재궁(梓宮)을 안치하는 10월에 직접 참관한 이후 정조의 원행은
대체로 사도세자의 탄신일인 음력 1월 21일에 맞추어 가능한 1월과 2월 중에 이루어졌다. 바쁜 농번
기를 피해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원행을 다녀오는 일정은 주로 현재 수원의 화성행
궁에서 머물며 현륭원을 오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덤을 이장한 이듬해인 정조 14년(1790) 2월 원행에서는 현륭원 화소(火巢)를 직접 살펴보고, 독
산성에 직접 오르는 일정이 추가되었다. 독산성은 현륭원 남쪽 약 2km 지점에 있는 208m의 독산(禿
山) 정상에 둘러쳐진 산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었다. 현륭원 조성 이후
원소를 관리하는 다양한 방안들이 나오는 과정에서 원소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독산성과
관련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독산성이 현륭원의 좌청룡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한눈에 보인다는 이유로
독산성의 존폐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55)
독산성 존폐와 관련해서는 현륭원 조성을 총괄한 원소도감 당상 정민시(鄭民始, 1745~1800)와 총
오산시사 호사 김익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정민시는 독산성의 형국이 목국[木局 : 艮·卯·巳向]
이고, 산성에 무기를 쌓아 두고 있으며,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산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김익은 현륭원과 산성의 거리가 가깝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해도 좋다는
제
2 의견이었다.
권
54) 이정윤, 「현륭원 석물 조성 연구」, 『역사문화논총』 제5호, 2009, 185쪽.
148 55)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구문화사, 2009, 342쪽. - 이하 독산성은 이 글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