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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리사는 오산의 전통문화유산의 요람으로 표현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177
                  두 곳이 있다. 오산시의 화성궐리사와 논산시의 노성궐리사가 그것이다. 화성 궐리사는 1792년(정조                                         역사

                  16) 정조의 왕명으로 창건된 공자의 사당이다. 오산의 화성 궐리사터인 구정촌은 중종 때 경기감사                                           /  유적
                  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이름 높았던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이후 곡부공씨 동족마을이 되었다. 1792년(정조 16) 9월 정조는 공서린에게                                      · 유물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내린 뒤 궐리사를 짓도록 하였다. 정조의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을 뿐 아니

                  라 ‘궐리사’라는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주었다. 이는 유림들로 하여금 공자의 충효사상을 통해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지원세력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주작 성리학의 근본을 통찰함으로써 선비

                  정신을 함양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이후 춘추(春秋) 제향에 쓸 향축을 지방관에게 내려보내 제사지내게 함으로써 사림의 정신

                  적 상징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궐리사는 지역 유림들 사이에서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되었
                  고, 지역의 자부심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궐리사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단행된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훼철되면서 상황은 급변하
                  게 되었다. 일반 서원과 성격이 다른 궐리사가 훼철될 것이라 믿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결국 결

                  국 궐리사가 창건된 지 79년 만에 훼철되면서 오산지역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던 기능은 사라지
                  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지역의 유림들을 비롯한 유지자들은 궐리사의 복설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

                  다.
                    즉 1884년 경기 유학(幼學) 김태식(金泰植)·정최수(鄭最秀) 등과 충청도 노성 유학 김재정(金在

                  正)·안봉량(安琫良)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궐리사의 복설을 청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1894년 궐리사가 훼철된 지 23년 되는 해에 오산의 유학자 심의윤(沈宜允)·공병렬(孔秉烈) 등

                  의 주도로 궐리사 유허지에 담장을 쌓고 제단(祭壇)을 세우고 매년 봄가을 석전대제를 지내기로 하였
                  다. 이에 1896년 뜻을 같이하는 200여 명의 사림들과 양한계(陽漢稧)를 조직하여 제반 비용을 담당

                             1)
                  하게 하였다.  양한계는 궐리사 경비부족을 해결하고자 조직한 것이다. 이에 1897년 강학에 중점을
                  둔 계규(契規)를 제정하였고, 1899년 3월 유사 이한익(李漢益)의 주선으로 강당 6칸을 창건하고 강학

                  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근본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고, 근본에 힘쓰는 방법은 강학(講學)에
                  있다는 인식이었다.

                    이듬해인 1900년(광무 4) 7월(음) 근암(謹菴) 심의윤(沈宜允), 야우(野愚) 서정순(徐政淳), 노암 공광
                  렬, 돈암 공병렬(孔秉烈)과 여러 사림들이 궐리사 중건 신청서를 장례원에 제출하고 장례원경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드디어 궐리사가 중건되었다. 궐리사 훼철 이후 29년, 설단 후 6년이 되는 해였다.
                    1894년 3월 이래로 근암(謹菴) 심의윤(沈宜允)과 야우(野愚) 서정순(徐政淳)을 강장(講長)으로 궐리

                  사에서 강학이 진행되어 일제강점기 내내 진행되었다. 궐리사 중건을 이끈 사람들은 노론 낙론 계열
                  의 고산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학통을 잇는 학자들이었다. 고산 임헌회의 제자로 호남의 간재






                  1) 화성궐리사, 『華城闕里祠誌』 2011, 7~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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