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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사창(社倉) 90칸, 설창(設倉) 23칸, 해창(海倉) 40칸, 쌍창(雙倉) 27칸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
러나 순조 31년(1831)에 간행된 『화성지』에는 『수원부읍지』에 기록된 6개창 대신 일창·오창·육창·
칠창·팔창·구창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창의 명칭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또한 『대동지지』에는 화성 성내에 4개의 창(倉)과 23개의 고(庫)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서 4개의 ‘창(倉)’은 읍치내의 일창·이창·광주창·용인창, 그 외에 용주사의 삼창, 산성[독산성]의
사창과 오창, 쟁홀면의 육창, 청룡면의 칠창, 공향면의 팔창, 우정면의 구창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전영지』에도 9개의 창과 광주창·용인창을 포함하는 총 11개의 창이 확인된다. 이러한 결
과는 18세기 이후 지리지에서 확인되는 창의 변화가 읍지에도 적용된 것으로 19세기 초반부터는 지
역의 이름으로 불리던 창의 지명이 숫자로 재편되어 운영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수원부의 창 중에서 현재 오산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창(倉)은 산창(山倉)이었다. 산창은 정조년간
원활하게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19년(1795) 수원부에서 치러진 을묘원행 기간 중 혜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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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회갑연을 기념하는 진휼행사가 화성부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정조는 화성행궁의 신풍루, 가승지
이유경(李儒敬, 1747~?)은 사창,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은 산창, 홍인호(洪仁浩, 1753~1799)는
해창에서 기민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가졌다. 이때 진휼행사가 이루어졌던 곳은 창고
가 위치한 곳으로 곡물의 조달이 용이한 곳을 선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을묘원행 이후 을묘정리곡
을 전국에 분배하는 과정에서도 산창 114섬, 사창 145섬, 설창 118섬, 해창 41섬, 쌍창 101섬, 사창(司
倉) 220섬 3말 5되를 모두 조(租)로 바꾸어 각 창에서 보관하였다. 86)
산창은 독산성에 위치하던 창고로 19세기 중반부터는 사창과 오창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었다.
다음은 사창과 오창이 관할하던 지역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오산지역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표 11. 독산성 내 산창
『수원부읍지』 『화성지』 『기전영지』
창(倉)
(1789 이전) (1831) (1895)
사창(四倉) - 독산성
산성면·초평면·청호면·삼며곡면·
정림면·어탄면·동북면·태촌면[山倉] 산성면·초평면·청호면·
오창(五倉) 독산성
정림면·어탄면·동북면
사창(四倉)과 오창(五倉)은 독산성에 자리 잡고 있던 창고이다. 독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한강 이
오산시사
남의 거점지역으로 호서와 호남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지
방 군사체제 내에서 중진(重鎭)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독산성 전투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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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정해득, 「正祖代 水原移邑과 以後의 변화 양상-수원지역 ‘邑誌’를 중심으로」, 『京畿史學』 3, 1999, 104쪽.
85) 『원행을묘정리의궤』 권1, 연설, 정조 19년 윤2월 14일(병신).
174 86) 『원행을묘정리의궤』 권3, 장계, 정조 19년 3월 24일(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