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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名曰明新學校라 하고 女학校를 該校內에 增設하야 男女學員이 百餘名에 達하얏다더라. 22) 185
역사
오산동은 상오산, 하오산의 위아래 마을 4동과 5동을 합쳐 200여 호가 되었는데 명진학교와 일신 / 유적
학교를 각각 세워 운영하였던 것이다. 위아래 마을 주민들이 각기 의무적으로 경비를 부담하여 교육
하였는데 서로 협의하여 두 학교를 통합하기로 했다. 이에 한 학교로 통합한 것이 ‘명신학교(明新學 · 유물
校)’였다. 이에 명신학교는 여학생 반을 두어 남녀 학생과 교원이 1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아마도
명진학교와 일신학교의 통합은 최종적으로 1908년 말에 이루어지고, 1909년 4월 1일부터 명신학교
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립 명신학교(明新學校)는 1909년 명진학교와 일신학교가 통합되어 새롭게 설치된 학교이다. 오
산리의 이들 2개 학교는 통합하여 보다 규모있는 학교로 개설한 것이 사립 명신학교였다. 1909년 명
신학교 개교 당시 학생은 보통과 남녀 100명이었다. 23)
그러나 일제는 1902년 2월 <기부금품모집 취체규칙>을 제정하여 사립학교의 운영자금의 핵심이었
던 기부금을 금지, 규제함으로써 지방 사립학교 운영에 타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또한 1909년 4월 <
지방비법>을 공포하여 지방재산과 시장세 및 잡세에 의존하던 지방 사립학교들을 폐교시키고자 하
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교묘한 사립학교 탄압 흐름 속에서 새롭게 설립된 사립 명신학교도 재정
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水原郡 晴湖面 鳥山 私立明新學校가 廢止 境에 至얏더니 校監 李容默氏의 熱心敎育과
學監 金鎭台氏의 實志奬勵로 校况이 煥然日新다고 當地來人의 穪頌야 有더라. 24)
일제의 탄압으로 명신학교가 폐지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1910년 5월 현재 교감 이용묵(李容默)과 학
감 김진태(金鎭台)의 노력으로 학교 상황이 새로워졌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하면서 명신학교의
운명도 흔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신교육을 통한 민족정신을 함양시키는데 목적을 두었던 사립 명신
학교는 결국 1913년 4월 1일 개교한 오산공립보통학교로 인수되었다. 사립명신학교 학생 76명이 오
산공립보통학교로 인계되어 개교하였기 때문이다. 오산공립보통학교는 이후 1941년 성호국민학교,
1996년 성호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 오산시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가 될 수 있었다.
사립명신학교 학생 76명이 오산공립보통학교로 인계되어 개교하였다. 현재 성호초등학교에 소장
된 『졸업자 학적부』를 통해 사립 명신학교 출신으로 오산공립보통학교 졸업자 46명을 확인할 수 있
다. 1914년 제1회 졸업생 13명, 제2회 8명, 제3회 11명, 제4회 12명, 제5회 2명 등이다.
22) ‘明校壹新’, 『대한매일신보』 1909. 1. 10.
23) ‘明校壹新’, 『대한매일신보』 1909. 1. 10 / ‘烏校更新’, 『황성신문』 1910. 5. 17.
24) ‘烏校更新’, 『황성신문』 1910.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