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오산시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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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대표적  유적지,  독산성







                  1.  독산성의  구조와  독성려왕릉




                    오산은  예로부터  군사전략상  요충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선점을
                  위해  벌이는  전쟁의  참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또  고려시대에는  서해안  내륙(수원,

                  안성)에까지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독
                  산성전투(세마전투)가  조선의  안위를  결정짓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고,  그리고  최
                  근에는  김일성이  일으켰던  6.25전란까지도  오산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오산
                  의  방어선  구축이  각  시대  공히  독산성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산성의  구조와  역사,  의미를  알아보도록  한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석대산,  향로봉이라고도  불렸던  독산(禿山)에  소재하는

                  삼국시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산성이다.  삼국시
                  대에는  독산성,  조선시대에는  독성산성,  독성,  독산성,  독왕산성,  독추성  등으로  불
                  리다  세마대첩  이후에는  세마산성으로도  불리었다.  지금은  독산성으로  통일됐다.
                    2~3세기의  오산지역의  마한세력은  세교지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

                  키다가  서서히  백제에  편입된다.  또  신라가  오산지역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과정은
                  독산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가  오산지역에  진출하는  시기는  553년(진흥왕  14년)이다.  독산성은  복원을  위
                  해  2016년부터  학술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북벽  일원의  발굴조사에서  축조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기도  했다.  발굴을  통해  독산성은  군사적  목적의  시설임
                  과  동시에  행정적  치소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도  확인했다.  신라가  오산지역을  차

                  지한  이후  독산에  군사·행정적  성격의  시설이  설치  운영된  것으로  산성  주변의  유
                  적에서  발굴된  유물에서「수水」자  명문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개칭된「수
                  성군水城郡」으로  판단되는  것으로  수성군의  중심부인  읍치는  오산  독산성에  위치
                  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즉,  수성군의  중심은  오산지역으로  이후

                  통일신라~고려  초까지  어느  시점에  치소가  산  아래  수원고읍성(융릉주변)으로  이전
                  되고  수주(水州)라  불리게  되었다.  오산은  옛수원의  행정적  중심이었다.  신라  진출
                  을  기준으로  약  1500년이  지나면  오산시  치소  오산시청이  오산동에  설치된다.
                    독산성에는  권율장군의  기념  장대인  세마대와  군진의  사찰인  보적사가  함께  있다.
                  독산성과  세마대  터를  함께  묶어  사적  140호(烏山禿山城과洗馬臺址)로  지정되어  있
                  다.  독산성의  축성  형식은  산  정상  80%  능선에  세운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  1,095m의  성이며,  2019년  발굴조사로  삼국시대  신라가  돌로  쌓은  석축산성
                  으로  새롭게  확인되었으며,  조선  전기,  임진왜란  때에는  토성으로  덧쌓은  것으로  추
                  정되며,  조선  선조  27년(1594년  임진왜란  중)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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