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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례용 환구가 빈출하는 현상이 대조적인데, 이것은 권력과 종교적 제의를 행사하는 방식에서 지 51
역성이 반영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특히 화성 동학산유적은 산 위의 고지(高地)에 역사
직경 80~100여 미터 규모의 환구 3줄이 확인되었고, 청동끌 거푸집의 출토 양상으로 볼 때 다음과 / 유적
같은 몇 가지 추론을 가능케 한다.(그림 37) 첫째, 환구 축조에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점, 둘째, 환구 축조는 단속적으로 3번 이상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 셋째, 환구 내부를 의례공간으 · 유물
로 본다면 청동끌 거푸집은 의례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이다. 또한, 환구 밖에 위
치한 15호 수혈은 아마도 의례와 관련된 시설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동학
산유적의 환구는 인접한 중심마을의 우두머리〔首長〕가 주도하여 동일한 제의권(祭儀圈)에 속한 주변
36)
취락의 구성원들과 함께 축조하였으며, 여러 번에 걸쳐 다시 만든 점에서 단속적(斷續的)이지만 비
교적 오랜 기간 의례공간으로 이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수장 권력과 의례 공간 및 의례 행위는 서로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37)
한편, 이와 같은 오산·화성·수원지역의 환구 유적의 성격과 관련하여 원삼국시대 삼한의 소도
(蘇塗)와의 관련성이 검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또는 후기의 환구가 마한의 소도와
직접 연결된다는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마한의 고지(故地)인 이 지역에서 마한의 원류로 추정하고
38)
있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의례공간이 다수 확인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그림 38·39) 청동
기시대 환구를 소도의 기원으로 볼 여지가 일부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더 많은 발굴 자료와 연구
가 필요하다.
그런데 오산지역에서 청동기시대 후기로 편년되는 환구와 같은 시기의 집터와 무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청학동유적에서 나무널무덤 1기만 확인되었으며(그림 40), 가장동유적이나 내삼미동유적에
서 구덩이 유구가 일부 존재할 뿐이다. 향후의 발굴성과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해석
이 필요한지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이어서 철기가 등장하는 청동기시대 만기 또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세기에
서 기원전 1세기)의 고고학 자료는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오산에서는 삼각형점토띠토기를 독무덤〔옹
관묘〕으로 이용한 탑동유적이 유일한 사례여서(그림 41) 이 시기의 문화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36) 호서지역을 비롯한 남한지역의 이 시기 수장묘(首長墓)의 존재와 사회 복합도를 고려한다면, 주변 취락의 일반 구성원들이 환구 축조
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7) 이형원, 2012, 「중부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 취락의 공간 구조와 그 의미」, 『고고학』 11-2.
38) 이형원, 2018, 「삼한 소도의 공간 구성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중부지역의 환구 유적을 중심으로-」, 『백제학보』 24, 백제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