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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이 5,000원이었고 등록금은 한 학기 8,700원이었는데 대여장학금은 1만5,000 원이었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문리대 에서단2명의대여장학생중내가들어간것 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4학년졸업때까지1년에3만원씩장 학금을받으며학비를내고도돈이남아책 을 샀고 생활비까지 보탤 수 있었다.
나는 기도하면 이뤄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됐다. 하나님은 입시 제도까 지바꿔주셔서대학에입학할수있도록길 을 열어주셨고, 등록금이 없는 내게 장학금 을주셔서무난히대학을졸업할수있게해 주셨다. 졸업 1년 후 이 장학제도는 폐지됐고 1년 후부터 한 달에 500원씩 환수하겠다는 것도다탕감해주었으니이제도야말로나 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하신 것으로 밖엔생각할수없다.나는국가에빚을진사 람이다.나아가하나님께단단히빚진자되 었으니그은혜를갚으며살아가는것이마땅 한일이다.나는나라와하나님께빚진자로 서 조국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 갈의무를가진사람이됐다.앞으로도이감 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서 ‘빚’을 갚 도록 할 것이다.
6) 도스토옙스키 탐독 후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
화여고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지방에서 올라 온학생들은거기에끼지못해소외되기십상 이었다. 나는 오히려 초동교회에서 열심히 신 앙생활을하며지방출신의설움을달랬다.서 울에서학교를다닐때는교회성가대로봉사 했다. 교회는 언제나 따뜻했고 어머니 품 같았 다.
초동교회 성가대는 성탄절이면 성도들 의집을찾아다니며성가를불렀고우리는성 도들로부터 감사 선물을 받았다. 한번은 장로 님이새벽에성가대원모두를집으로불러떡 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2층 넓은 마룻방에 꾸 며진 성탄트리에 반짝이는 전구들이 어찌나 아 름답던지, 지금도 그날의 정겨움이 눈에 선하 다. 그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던 단짝 김남 순은파키스탄에선교사로갈결심을하고비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내 전이발생해비자가나오지않는바람에남순 이는선교사의꿈을접어야했다.사실친구가 먼저가서자리를잡은후나를부른다고했는 데, 그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들은 경기·이
김소엽교수 간증ᅵ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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