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PHOTODOT 2018년 7월호 VOL.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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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평생에 걸쳐 공들여 만든 수작업을 아무런 보조물 없이 관객만을 위          러 작업이다. 판화지에 수채화 물감을 바른 후 감광유제를 발라 인화한 방식
                                                                                                                                      해 내어주는 모습은 평소의 ‘작가관’을 엿보게 했으며 매우 감동을 주는 전시         이다. 이 작품들은 맨눈으로 볼 때 작가 특유의 언표들과 손맛으로 호사를 누
                                                                                                                                      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은 이번 전시회에 대해 “수공          르게 된다. 젊은 나이에 끝없이 드넓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을 어떻게 품
                                                                                                                                      적인 것에 깊이 천착하여 독특한 시각 언어를 창조해 낸 작품세계”라며 “익숙         을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막’ 사진하면, 이정진을 어렵지 않게
                                                                                                                                      한 것들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작품과 마주하며 내면의 울림에 귀 기           떠올릴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울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덧붙였다.
                                                                                                                                                                                         한국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 <파고다> 연작은 8년간의 뉴욕 생활을 접고 서
                                                                                                                                      국내외에서 개최되는 주요한 그룹전에도 많은 참여를 했다. 특히, 2011년에는        울로 돌아와 시작한 첫 번째 작업이다. 뭔가 한국적 소재를 찾던 중 부석사 3
                                                                                                                                      프랑스의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프레데릭 브레너(Frédéric Brenner)     층 석탑을 보고 영감을 얻어 6개월에 걸쳐 한국 석탑 25점을 담았다. 주변부
                                                                                                                                      가 기획한 이스라엘 국제 사진 프로젝트 ‘This Place’에도 참여했다. 독일 현    를 모두 지운 뒤 거두절미하고 석탑이 갖는 세월의 역사성과 조형성이 주목
                                                                                                                                      대사진을 대표하는 토마스 슈트루스(Thomas Struth, 1954- ), 매그넘 소속의   받은 작품이다. 하나의 석탑 이미지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서로서로 반영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세프 쿠델카(Josef Koudelka, 1938- ) 등 총   듯 위아래로 놓여있다. 눈여겨볼 점은 똑같은 한 장이 아닌, 좌우가 바뀐 이미
                                                                                                                                      12명의 세계적인 사진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였다. 이스라엘의 분쟁지역에            지 배열로 또 다른 석탑 하나가 재탄생 된 셈이다. 이는 파고다의 종교적 상징
                                                                                                                                      서 발견되는 다양한 시선들을 담아 2014년 체코의 DOX 현대미술센터와 2015      성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컬러 작업이 아님에도 불구하
                                                                                                                                      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미술관, 2016년 미국의 브루클린 미술관 등의 세계         고 천연의 한지 특유의 노르끼리한 빛을 띠거나 닥지 특유의 거친 나무껍질
                                                                                                                                      유수의 미술관에서 발표했다. 이때 이정진의 사진은 가장 독보적인 작품으로           의 흔적이 듬성듬성 드러나 고즈넉한 한국적 정취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정
                                                                                                                                      주목과 지지를 받으며 국제 사진계에서 더욱 주시하는 사진가로 구축되었다.           진 사진가만큼이나 한지를 잘 다룬 작가가 또 있을까. 습도와 온도에 민감한
                                                                                                                                                                                         한지를 아날로그 사진 작업에 도입하거나,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을 덧입히는
                                                                                                                                      1990년대 초, 광활한 미대륙을 여행하며 찍은 사막, 바위, 덤불, 선인장 등 원     등 사진 매체의 표현 형식의 확장과 개발은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적인 자연 풍경을 주제로 4개의 연작을 제작했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이한          일까 최근 작업 중 일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모로
                                                                                                                                      비현실적인 감응을 사진으로 담아냈는데 미국의 사막 III의 ‘자화상’은 ‘신체’가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아날로그 방식이면 어떻고, 디지털 방식
                                                                                                                                      유일하게 등장한다.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직관적 느낌으로 파인더를 보지            이면 또 뭐 어떻겠는가. 비단, 사용 재료가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도 아날로그
                                                                                                                                      않고 리모컨을 가지고 촬영했다. 깡마르고 빳빳한 신체는 뜨거운 내면세계와           한지 작업을 좀 더 많이 볼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건조하거나 야성 넘쳐 보이는 사막과 만나 절묘하게 서로를 접속한 듯 아찔
                                                                                                                                      하다. 유학 생활 직후 작업의 첫 소재로 선택한 대상이 미국의 사막이었다. 유        이정진의 또 다른 작업, <바다, Ocean, 1999>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 자체
                                                                                                                                      학 중에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작가의 ‘사막’은 당        가 갖는 ‘물’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초현실적인 대상으로 제시했으며 <무제,
                                                                                                                                      시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던 안셀 애덤스나 에드워드 웨스턴의 재래식 문법과           Untitled, 1997~99> 연작은 해변에 있는 나무 기둥, 바다와 부두, 물 한 가운
                                                                                                                                      는 다른 사막이었다. 과감하고 자유로웠으며 낯설고 생경했다. 각각의 사진           데 떠 있는 섬 등 자연을 다루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세 번에 걸쳐 반복적
                                                                                                                                      이미지는 3개가 모여 한 세트가 되도록 엮여 있다. 해체된 프레임으로 토막          으로 한 화면에 담아 추상성을 가중한다. 똑같은 사진이 반복적으로 위아래
                                                                                                                                      난 사막 언저리에 신체 일부가 얼핏 드러나거나 때론 투박한 허벅지와 무릎,          로 진열되지만, 수작업으로 생성된 이미지는 매번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이정진, 무제 89-05, 1989 ⓒ 이정진                                이정진, 무제 89-01, 1989 ⓒ 이정진
                                                                                                                                      벌어진 손가락과 머리카락 풍경은 절묘하게 우리를 흥분시킨다.                  데 다름을 찾는 재미 또한 솔 솔하다.

                                                                                                                                      한 장이 아닌, 여러 장의 이미지를 하나로 엮은 방식이 처음 도입되었고 이후         이정진의 작품 중에 유독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사물, Thing, 2003~07> 연
                                                                                                                                      이정진의 작업에서 자주 사용된다. 한지의 작은 크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방           작은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것들이다. 작은 토기 항아리, 녹슨 숟가락, 의자
                                                                                                                                      법이기도 했지만 주지하는 메시지 어필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사막 연작           등받이 등 사진 속 대상은 극단적으로 크롭핑 되거나, 프레임의 끝 가장자리
                                                                                                                                      중 사막 II는 다른 연작들과는 다른 점들이 많다. 이정진의 사진 중 유일한 컬       에 놓이는 등 예민한 미니멀리즘의 시선이 돋보인다. 시선이 갔던 대상을 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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