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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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비자를  못  받으면 기도해서 해결하면 되지!”
               선교사로서의  나를  평가했던  그들의  말은  아플  대로  아파  있던  나에게  힐난처럼  느껴지며,
               당시에는 솔직히 원망 아닌 원망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후원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며,  비자문제도  해결하면서  장기사역에  도전할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지를  바꿔볼까?’
               고민이  한층  더  깊어지고  말았다.  마음도  더  고단해졌다.  영적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  사역한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팀원과  가족의  비자  문제까지  걸려  있었다.  한국에서  쓴  소리가  날아왔다고  해서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심하게  아픈  곳이  저절로  낫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수술이  필요하다면  병원을  가야  하는  현실적인  조치가  동반되는  것이  정상이듯,
               당시의 내 삶을 위한  현실적인  조치를 위해  사업장으로  나가야 했다.

               마음을  다잡은  후,  내일은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노선을
               정했다. 하루를 마치고  지친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찾았다.
               “주님, 지혜를 주십시오.  여기서 멈출 수 없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한숨과 기도 속에서  섬광처럼  한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 사람을 얻자.  물건보다는 사람을  사귀는 데  더 초점을 두자.”

               다음날,  예전에  만났던  사람을  다시  찾아갔고  대화의  틀을  바꾸었다.  사업보다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  한국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함께  해나가는  행복을  알려주고
               싶다고  진심을  다해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진심이  통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애를  쓸  때는  그토록  어려웠던  계약이,  좋은  관계를
               맺고  나자 훨씬 쉬워졌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첫 번째 쾌거가 후지카메라 250 대 판매 계약이었다.
               주여!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  기쁨과  환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며,
               지금도 여전히  가슴을 둥둥 뛰게  만든다.

               첫  계약이  성사되자,  이  후로  계속해서  컴퓨터  부품,  타이어,  건축자재  등의  계약을  이루어냈고
               서서히  고생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차  사업으로서의  형태가  갖춰져  갔다.  처음에는  한
               번  물면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물건을  팔았다면,  이제는  물건을  파는데  급급하지  않고
               파트너를 왕처럼 받들며  마음을 주며 관리했다.

               파송교회

               담임목사의
               직언
               사업방향이  이렇게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데는  파송교회  담임목사의  직언으로  힘을  얻은  부분도
               있다.  사실,  나는  파송교회  없이  선교지에  나갔다.  현지  선교사들이  파송교회  얘기를  하면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사역비와  생활비  등은  문제가  없었지만,  파송교회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전도사로  사역한  적이  있는  평촌  새
               중앙교회와  연결이  되었고,  그  교회를  파송교회로  얻게  되었다.  선교를  교회의  최고  덕목으로

               삼는  교회,  담임목사의  선교  마인드가  확실한  교회였기  때문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송  시  담임목사님의 말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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