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샘가 2025. 5-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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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차자 에브라임을 장자 므낫세보다 앞세웁
            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17-20)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장자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당연히 장
            자인 므낫세가 오른손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
            력이 좋지 않아 손을 잘못 얹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요셉
            에게 에브라임이 더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라 말하며 뜻
            을 굽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
            고 오히려 대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알리
            셨을 때 제자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
            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1-23). 우
            리의 육적인 눈은 어두워질지라도 영적인 눈은 밝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21-22) 이스라엘이 축복을 마치고 하나님
            이 너희와 함께 계셔서 언약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인간의 한계와 하
            나님의 영원성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
            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며 땅을 분배합니다. 이스라엘은 신실하게 언약
            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얻은 것처럼 그 땅을 분배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히 11:1). 이스라엘은 아직 애굽에 있는 자녀들에게
            가나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갈 것을 마지막 유언의 형식을 빌어 축복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직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가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해야겠습
            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모든 위로가 있고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만물이 새롭게 한 곳이며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곳입니다(계 21:1-7). 그 나라에 가기
            까지 이 땅에서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는 삶이 쉽지 않겠지만 우리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복을 나누며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예비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서 생각해
            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창조학자들에 의하면 노아 홍수 이후 큰 지각 변동이 있었고, 육지엔 더 높은 산들이 나타나고 바다는
             더욱 깊어졌을 거라고 말합니다. 지구를 뒤덮었던 물은 대부분은 바다로 흘러가고 남극과 북극의 빙산
             과 빙하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빙산은 물이 얼어있는 상태로, 물 밖으로 드러난 부분은 10%에 불과하며
             90%는 물속에 잠겨있는 상태입니다. 아무도 물 밖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 보고 전체의 규모와 모양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진화론에서는 10%가 아니라 0.001%에도 못 미치는 흔적들로 지구의 역사를
             규정하고 인류의 진화단계를 설명합니다. 그런 진화론은 이제 우리나라 학문과 상식의 근간이 되어 어
             린 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식을 뒤엎는 행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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