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 - 이형곤 초대전 9. 6 – 9. 22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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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自現)의 예술, 자연(自然)의 영성, 자유(自由)의 미학
- <무위의 풍경 Ⅱ>의 삼자(三自) 풍경(風景) -
박 종 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1. 재현(再現)과 표현(表現)을 넘어선 자현(自現)의 영성 예술
예술은 오랫동안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삼아 그 형태나 색채를 모방하거나 재현해 왔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대상을 객관적으로 모방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특히 미술 작업의 시각적 재현은 사진과 영화의 등장과 함
께 종언을 고했다.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은 원근법을 비롯한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식주의적 표현을 시도
했고, 작가가 주관적으로 대상의 형태를 변용하기도 하고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색채만으로 현실 세계나 자연으로
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창조적 표현을 과감하게 실천했다. 인상주의나 추상표현주의 등을 통해 본격화된 근대 미학
의 전환은 대상의 객관적 재현(representation)으로부터 작가의 주관적 표현(expression)으로 변화로 나타났다.
외부 세계를 발견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전통적인 예술은 물론, 내면의 관념을 창출하여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근대적인 예술은 모두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연의 객관적 재현에 충실했던 전통적인 예술이
나 작가의 주관적 표현을 감행하는 근대적 예술은 주체의 시선(eye)에 포착되는 사실주의 계열의 예술적 형상화
나 객체의 응시(gaze)가 부각되는 인상주의나 형식주의, 추상주의 계열의 예술적 실험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이러
한 예술적 시도들에서 예술의 주체와 대상, 작가와 작품과 감상자는 서로 분리된다.
자연의 경관이나 사람의 외모를 묘사하든, 인간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든 간에, 이러한 분리는 현상적 개
별자에 대한 형상화를 구현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현상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들은 실제로 개별적 차이를 전제
로 상호 구별된 채 연계된다. 상호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분리된 채 자족적
인 존재자는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현상적 개별자들은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緣起)적 존
재의 네트워크 안에 일시적으로 생멸하는 유한한 존재 양상을 지닌다. 『주역』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측면
에서 보면,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며, 인간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는 현상적으로 존재
하지 않는다. 현상적 개별자의 예술적 형상화가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주체와 대상의 분리, 창작과 작품과 감상의
분리는 예술을 통한 진정한 소통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현상적 개별자 미학의 한계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한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은 재현과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합일,
창작과 감상의 합일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따라서 차이와 분리를 전제하는 현상적 개별자 미학을 넘어서는 근
원적 보편자 미학을 지향해야 한다. 이형곤 작가의 <무위(無爲)의 풍경(風景)> 연작은 대상의 객관적 재현과 주체
의 주관적 표현을 넘어서는 ‘자현(自現)의 예술’을 통해 근원적 보편자 미학을 펼친다. 그는 현상적 개별자가 아닌
근원적 보편자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영성 예술(spiritual art)의 새로운 장을 보여주고 있다.
개별적 차이를 전제로 구분되고 연계되는 현상적 세계는 객관적 물질성과 주관적 정신성, 몸과 마음의 유한한 움
직임을 보여주는데, 현상적 개별자를 주제로 삼는 기존의 예술은 그러한 유한한 움직임을 객관적 사물이 보여주는
대로, 혹은 주관적 생각에 따라 보고 싶은 대로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반면, 근원적 보편자를 주제로 삼는 영성 예
술에서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현상적 개별자가 궁극적 보편자가 합일
되고 현상적 개별자들 간에도 온전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신비’가 저절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영성의 자현(自現)’이
라고 할 수 있다.
2. 자연(自然)의 영성이 현현하는 무위(無爲)의 예술적 풍경
영성 예술은 우주 만물이 본래 존재, 즉 자연(自然)이 보편적 영성으로 현현하는 궁극적 보편자의 예술적 형상화
다. 이를 위해서는 보편적 근원과 개별적 현상의 합일인 이사무애(理事無碍)와 현상적 개별자 간의 온전한 소통인
사사무애(事事無碍)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물아일체(物我一體)
로 표현되었던 대우주와 소우주, 우주와 인간, 주체와 대상의 예술적 합일이 이루어질 때 창작자, 작품, 감상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