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이형곤 초대전 9. 6 – 9. 22 장은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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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풍경 Ⅱ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의 시공간 위에서 나는 무엇이고 오는 곳이 어디이고 어디로 가는가?”는 내 삶의 중요한 화
두이다. 너무도 뻔한 사춘기적 번뇌는 평생에 걸쳐 나의 삶의 방향을 조정하고 붓질을 업으로 하는 지금의 나를 있
게 했다.
이렇듯 세상과 나에 관한 의문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의 고찰을 있게 했고, 내 스
스로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사이 의식의 흐름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이고 마음적인 것으로의 전환
을 가져왔다.
그 전환의 상황은 “목적의식이든 의구심에서 비롯된 탐구였던 그 지난한 시간들을 뒤로하고, 작위적이고 계획되
고 부자연스러운 그 모든 의지를 다 내려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또 그렇게 보여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에 대한 성찰이다.
그간의 작업을 있게 한 시간, 공간, 에너지에 관한, 즉 물리와 물질적인 고찰과 사유로부터 중중무진의 세상이 물
리보다 더 근원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더 합리적이라는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로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가져
왔다.
마음을 비우고 내맡김으로써 관조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관조의 상태마저 넘어서는, 주체와 객체의 간극조차 사
라지고, 신과 인간, 물질과 비물질, 실제와 허구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이 나이고 내가 모든 것이 되는 불
이(不二)의 세상, 그러한 근원적 보편의 모습에서 펼쳐져 있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 곧 ‘무위의 풍경’이지 않을까?
사유로 인한 한 개인의 각성은 쉼 없는 붓질을 있게 하고 그림의 제목이 된 ’무위의 풍경‘은 태초의 우주의 품처럼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곳,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심연의 방에서 보여지는 현상계 너머 본질에 관한 사유의 모습
을 표상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순수의 빛으로 펼쳐지는 본시의 근원적 풍경에 관한 성찰의 풍경이다. 보여지는 것
과 보는 것의 물질적 본질의 저 밑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모든 것의 시작에서 있어 왔던, 오롯이 빛으로만 찬란한
“진성”이 있음이다.
작업이 계속될수록 화면의 구성은 더 단순화되고 색의 사용도 단조로워지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구성과 색의 단조
로움,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힘든 노동과 같은 작업의 과정은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수행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옻칠이 주는 깊고 묵직함은 내가 추구하는 작품의 세계와 상통한다.
작업의 과정이 까다로운 옻칠이긴 하지만, 내구성과 항구성이 뛰어나고 재료의 가변성과 다른 소재와의 가합성이
모든 것을 품으며 모든 것의 변화를 수용하는 우주의 속성과 닮아 있는 듯하다.
- 작업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