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최인수 개인전 2024. 12. 4 – 12. 9 인사아트센터 부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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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편린에서 생성되는 성운(星雲)의 세계
근자에 산에서 일명 자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유유자적하는 사람들, 그리고 맨발로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에
대한 어떤 자각 아래 하나됨을 실천하고 있는 행위들로 보인다. 만인이 자연을 희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바로 오늘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요구되는 자연은 어떤 외양의 차원을 넘어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의 것이다.
이제 자연은 눈이나 감각으로만 향유하거나 상호작용할 대상이 아니고, 온몸과 내면으로부터의 교감을 수행할 장이자
대상이다. 이제 예술가가 화폭에 구현하는 자연도 실경의 재현 혹은 그 자극이나 인상의 기록에만 머물 수 없다. 자연주의
문학이 욕구와 본성의 존재를 자연 속에 던져진 것으로 역설하는 상황들은 참조할 만하다. 우리는 화폭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이 되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즉 ’생성하는 자연‘이도록 하는 미학적 과제이다. ‘저절로(自) 그렇게(然) 된’
세계로서의 ’생성적 자연‘, 바로 이 모토 위에 작품을 추구하는 경향들이 목격되고 있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인위(人爲) 혹은
작위(作爲)로써 자연을 구현하는 최적의 장 아니던가.
한국화가 최인수의 작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작가 그리기의 출발점은 보통 눈 앞에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며, 방법적으로도 사의적으로 재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 왔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재현이라는 프레임이 분출하는
듯한 내면의 에너지를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점차 대상과의 다각적 교감과 영감을 회화적으로
자유롭게 구현해나가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교감은 시간이 가면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감각의 범주를
넘어서는, 혹은 초월적 경험으로까지 비약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그림들이 추상성, 해체성, 초현실성, 우연성, 에너지로 충만한
세계를 이룬 데는 이상의 경로와 과정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어느 장르에서나 재현을 벗어나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은 신대륙을 향한 기약 없는 항해와도 같은 것이다. 어느 사이
부지불식 간에 망망대해 한가운데 놓이게 된 작가는 노장철학이라는 논거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기존의
개념이나 양식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양상의 세계로 생성되고 있어, 보다 개념 정리가 수월해지고 작업의 밀도를
더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들이 작업을 하는 데 있어 담론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가 있으며, 반대로 작업을 하다가 도중에
나침반 같은 어떤 담론과 조우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며, 담론의 탑재에 의해 개념적으로나
밀도면에서나 작업이 더 원활해지는 전기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그림에서는 몽환적인 도상들이 오로라처럼 펼쳐지고 있다. 지극히 유동적이면서도 밑도 끝도 없는 무한의
세계들이 역설적이게도 아주 가까이서 마주하는 자연의 편린들로부터 비롯된다. 한 그루의 나무나 한 포기의 풀 앞에서도
작가의 사유와 상상은 꿈틀댄다. 우주의 저 먼 곳의 푸른 은하와 성운(星雲)을 닮은 도상들은 반대로 주체의 내면세계, 혹은
마이크로와 같은 미시적 세계상과도 맞닿은 채 교환된다. 거기에는 존재와 무, 빛과 어둠, 실재와 가상, 찰나와 영원, 정과 동,
삶과 죽음, 처음과 끝 등의 혼재가 암시되고, 그렇게 또 하나의 자연을 생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러한 도식으로만 접근하려는 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작가의 초월적 태도는 그 어떤 경계가 없는 자유 그 자체다. 자연과 자유가 어떤 면에서는 배치될 수 있다. 자유에 인간의
욕구가 섞여 있는 한, 자연은 자유의 장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양자가 충돌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초월주의적 태도 자체가 욕구나 이해 같은 것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감각의 포석과 전개는 여전히
심미의 비중을 지니고 있다. 독자가 작품 안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작동하여 과즙처럼 분비되는 서사를 음미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그림이 어떤 전제 없이 우리의 상상적 경험, 심지어는 어떤 납량물 같은 짜릿한
경험들까지도 허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독해와 향유에 있어 어떠한 자율성이나 자유도 관람자의 몫이 아니던가.
2024. 12
미술평론가 이 재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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