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문득(聞得)_마음을 그릴 때 꼭 들어야 할 작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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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지 은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갑자기 찾아온다.
작년, 일상이 위협되었던 8월의 칼부림 예고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서이초 사건처럼.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충격과 고통이 지속되면 점점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출근해서 잠깐 커피 마시며 나눴던 담소, 점심 산책, 반가운 안부 전화, 일상속 뜻밖의 친절에 미소지었던 다채로운 감정들은 어느새 불안
과 우울, 분노에 집어삼켜진다.
다른 감정들은 느끼지 못한 채 오로지 내 마음에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는 깊은 슬픔과 두려움, 분노와 불안만이 남겨진 듯 압도되어 홀
로 씨름하며 지내기 쉽다.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큰 상처를 내며 통증을 일으키고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밤이 쌓여가면서 어느새 고통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작품 실(허지은, 2023)은 트라우마로 야기된 고통이 어느 순간 삶을 잠식해버리는 어둠이 되어가지 않도록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순
간들에 머물러 다시금 그 다채로움을 수놓아 가는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설레임, 감사와 희망... 지나가듯 찰나에 경험하는 감정들 그리고 작지만 반짝이는 순간들을 날실과 씨실로 엮어내듯
고통에 하나 하나 수놓고 있다.
또한 삶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을 견디며 생기는 상흔들을 감추거나 없애기보다 그 흔적 또한 삶의 한면임을 받아들이며 오롯이
그 고통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 의미로 오일파스텔을 칠하며 생기는 부스러기나 아크릴 물감과 젯소로 바탕을 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거칠거나 삐뚤빼뚤한 선 또한
하나의 작품 속 단면으로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색과 색이 겹쳐 새로운 색과 질감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 시간과 공간에 우리를 다정히 초대하고 있다.
혼자 외로이 씨름하지 않고 함께 엮어내며 고통 너머 새로운 색으로 우리의 삶이 이어질 수 있도록.
본 작품은 삶 전체가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삶속에서 경험하는 희노애락을 고통에 수놓겠다는 작가의 의지의 표현이자 삶의 태도이다.
씨실 날실 엮어내듯 오일파스텔로 그리면 발생하는 부스러기들을 삶에서 맞게되는 고통을 견뎌내며 생기는 상흔으로 표현했고 그 흔적을
감추거나 없애기보다 그 흔적 또한 내 삶의 한면임을 받아들이며 살아내는 태도를 담았다.
하얀 캔버스 위에 내가 고른 색을 칠하고 색과 색이 서로 겹쳐 새로운 색과 질감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 시간과 공간속에 나는 타인이 아닌 내 마음을 만난다.
하루종일 내안에 머물러있던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조화를 이루며 평온해지는 그 여정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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