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쌍교동 우아한 작당전21. 11. 11 - 11. 19 갤러리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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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보기
조 애 순
목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로 골목길로 드나들 나도 한때 네팔을 여행하면서 이런 곳이라면 내가 언젠가 다
며 집이며 학교며 다니기도 했기에 좁은 길, 골목길은 너무나 시 돌아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느
익숙한 대상이다. 조금만 유달산 쪽으로 오르면 화장터가 나 낀 것과 내가 다르지 않았으리라......
온다는데, 어린 시절 무섭다는 생각에 한 번도 갈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과 유달산 밑 솔밭에서 놀았던 기 올여름 지리산 노고단에 오른 적이 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
억은 있다. 지금도 유달산을 걸으며 어릴 적 놀았던 솔밭이 는 날 하지만 안개가 자욱한 날 숲길을 걸으면서 깊은 영감을
이쯤이었으려나 한다. 받은 적이 있다. 공기가 다르고, 내 사지와 육신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며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뭔가가 아쉬웠
물론 복잡하고 시끄럽고 또 자주 악다구니를 치며 싸우는 소 다, 산을 내려올 즈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숲에서 바
리를 듣는 것이 지겹기도 했고, 언제나 이런 좁은 곳을 떠나 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세상 유달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낯선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열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 지 깨닫게 해 준 순간이었다. 남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목포를
마저 집에서 다녔으니 그 꿈을 일찌감치 포기한 셈 그럼 결혼 낯설게 볼 수 있는 힘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라도 하면 목포를 떠나 낯선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싶었는
데, 웬걸 목포 남자를 만나를 만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익숙한 목포를 낯설게 보면서
새로운 목포의 이미지와 느낌을 갖고 그것을 힘으로 삼기 위
신혼 살림집이 찻길에서 가까워 창문을 열어 놓지도 못할 처 해서였다. 유달산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멋있지만 바보 마당
지라, 첫 아이를 낳고는 무안으로 훌쩍 떠나 시골살이를 전전 에서 보는 바다가 더 좋았다. 입암산에서는 바다가 더욱 가까
했다. 공기 좋고 조용한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욕심 웠다. 더 넓게 조명되는 것이 내 가슴마저 탁 트이게 만들어
때문이었다. 목포는 늘 지처에 있었고 양가 부모님도 다 목포 주었다. 양을산을 걸을 때는 늘 걷던 유달산과 다른 점이 보
에 계시니 무안에 살면서도 목포를 떠났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이기도 했다. 고하도에서 바라보는 목포는 어떤가. 목포 바깥
은 없다. 에서 보는 목포는 내 고향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저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는
우여곡절 끝에 마인계터에 삶터를 정하고 살면서 깜짝 놀랄 것이 더욱 행복했다. 점점 이렇게 목포를 이해하고 몸으로 받
일이 있다. 목포에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가 아들이는 중이다.
는 젊은 사람들(특히 여성들이)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
로 많지 않은가? 들리는 이야기로는 세계 도처를 여행한 분 그래 걷는다는 것은 속살을 보는 일이다.
들도 다른 곳을 마다하고 이곳에 정착했다는데 과연 무엇이 낯설게 보는 일이다.
그들로 하여금 목포에 정착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의아했다. 처음 걸어보는 길은 늘 긴장되고 풍요롭게 느껴진다. 내가 알
아보지 못했던 골목길을 걷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참 행복했
목포는 색이 좋다 맛이 좋다,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선창에 다. 보리 마당에서 내려가는 시화 골목이 아니어도 좋다. 아
아무렇게나 폐그물들은 색깔도 바라고 난잡하게 흩어져 있지 니. 어느 골목을 선택해 걸어도 좋다. 새로운 골목길을 걸을
만 그 변색이 이쁘다고 했다. 누구는 여기에서 어릴 적 고향 때 애써 아껴 놓은 보석 같은 느낌을 갖는다. 앞으로도 내가
의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산업화가 무딘 도시 때문일까? 왜 가보지 않은 목포의 새로운 길 골목들을 걷고 싶다. 여러 친
목포의 후미진 골목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일까? 그들 구들과 함께..
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맞다 목포
는 만인들의 고향에서 느낄 수 있는 향수를 담은 도시 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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