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기진호 개인전 2025. 3. 26 – 4. 12 갤러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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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을 지운다.(이우성 「풍선」, 2022) 알고 있었던 걸까. 그것은 생래적인 슬픔의 이유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있었다고” “기
              억한” 탓이다.(홍일표 「풍선 너머」) 화가 K는 풍선의 슬픔에 동참하기로 마음먹는다. 얼굴을 지우고 허공 너머로 사라진 풍선에게서 K는
              “눈을 뗄 수 없다”(박소란, 「모자를 쓰는 마음」,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 p.59). 마치 장사지내듯, 그가 “허공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다”. 그리고 쓴다, 그것은 애도이리라!, “그 속으로 네가 들어가고 내가 들어가고” “동그라미 속에는 네 목소리 내 목소리”(박상순 「울지
              않는 사람의 눈」, 2004). 알 것 같은데 K는 혼란스럽다.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린 게 나인가 풍선인가. 캔버스 앞에 머물 동안 그는 안전하
              다. 아직은, 아직은 그렇다. 하지만 화실 전등을 끄고 등을 돌리면 “혼령으로 세상을 떠도는 유령처럼”(차유오 「투명한 몸」, 2024) 네가 나
              가면 나도 나가겠다고 네가 나가면 나도 나가겠다고. 돌연, ‘너’(풍선인 줄 알았는데 나였던 너)와 ‘나’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너무 오
              랜 시간 풍선을 그린 탓이라고 화실을 빙빙 돌며 K는 생각에 잠긴다. “없는 것처럼 보여도 눈앞에 있는 것”이 풍선이라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가득 채워져 있는 것”(차유오 「투명한 몸」) 또한 풍선이리라. K는 어쩌면 고척동 화실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초상화를”
              (아르토, 앞의 책, p.123) 그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아직 한 발짝도 화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드거니 어둠을 응시 중이다. 환영 幻
              影 . “누군가 날 내려놓고 가버렸어.”(최정례 「풍선장수가 있던 사거리」)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차유오 「투명한 몸」)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풍선이 메아리친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잠시나마 이곳으로 올까.”(차유오 「녹지 않는 겨울」, 2024)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풍선이여 사랑이여 풍선이여 사랑이여 풍선이여 사랑!”(신동문 「풍선기 19호」, 2004) 이를테면 풍선을 에두른 당신의 사랑 이야기.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가 있죠.
              여자는 남자를 졸라
              번쩍거리는 도날드 풍선을 샀어요
              어린애처럼 마냥 행복했어요,(아시죠, 그런 행복을 우리가 얼마나 오직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지를)
              시간은 얼마나 빠르게 흘렀는지요
              여자가 남자의 팔을 껴안은 자기 오른손과
              풍선줄을 거머쥔 왼손을 보며
              비어 있는 남자의 손을 보며
              아니야, 아니야, 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건
              값을 치르고 상인의 손에서 받아든 풍선이
              남자의 손에서 여자의 손으로 건네지던 그 짧은 순간을 뺀 나머지의 영원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마음 한구석에서 시간의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사실은 그 짧은 순간을 뺀 나머지 영원
              여자는 놀라서 물었죠, 왜 내겐 풍선이 있는데 당신에겐 없나요라고.
              (이젠 당신도 아시죠)
              그들은 풍선 두 개를 샀고
              자꾸자꾸 풍선을 바꾸었고
              아무래도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어
              그래도 풍선 하나만큼의 빈자리가 못내 마음에 걸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시작에 불과하지요
              (...)
              그럼요. 사랑의 시작.

                                                                                                                                  - 노 혜 경 「풍선」(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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