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김상태 의병장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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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던 의병장 李康季의 中軍將으로 의병항쟁을 이끌던 분이다. 선생은 李康率


     이 체포 • 처형된 후 W泰 등과 더불어 의병부대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3년

     간에 걸쳐 경상북도와 충청남도의 접경 지대인 H月山과 小白山 일대에서 항쟁


     을 계속하였다. 1911년 5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옥중에서 투쟁

     하던 중 단식 13일 만인 1914년 7월 28일 순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ft5a


    %) , 일제침략하 36년사-2 p.829), 체포되어 단식 • 自婚하면서 아들 源箕에

     게 “공(이강년)의 묘 곁에 장례해 달라. 황천에 가서도 서로 의지하겠다”고 유언


     하였다고 한다(《雲岡先生偶義日錄>).




           이 사료를 옹해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B帝는 1910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경상 • 강원 • 충청도 일대의 독립운동

         을 말소하려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으며. 이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

         는 인물을 金尙合로 파악하고 검거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金尙合의 소재파악과 검거를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조사합동을 벌였는

         데. 이때 금전을 미끼로 조선인 밀정을 이용하여 金尙合의 동태를 샅샅이 파


         악했음을 알 수 있다. 신상이 밝혀진 조선인 밀정은 아래와 갇다.


                 (1)«興郡 丹山面 »岩1 거주 禹鐘應(58세)

                 (2)  뻕基郡 S基邑 거주 張復fc(59세)


         金尙合 의병장이 검거된 후 .•표鐘應과 張復紙에게 실제로 약속한 금전을 주었

         는지 이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다. 또 이들 밀정은 제천헌병대의 요성으로 제


         천경찰서(서장 市쓰OO)가 수시로 감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日帝에

         협력했다고 해서 日요 및 日퍼에게 완전한 신임을 받았던 것은 아니며, 언제

         든 배신할 수 있는 자로 파악하고 항상 감시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제천헌병대와 제천경찰서의 합동조사 및 밀정의 탐문으로 당시 제천군 伐川里


         산속(牛씨谷)에 잠복 중이던 W 일당이 밝혀졌는데, «州 • 地II 등지에서

         홖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역할과 W名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자료


         이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총대장 姜采秀                              선 생 朴西村


                 後軍將 成治安                             旧殘將 李벼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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