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김해일보164호(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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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8월 26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김해일보
-경남정신의 뿌리-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이어서>>>
김종간의 미친소리 스물 한 번째
이어서>>> 근본' 이라는 말과 《주역》'익'쾌의 '임금을 비롯한 장유암
상층계급을 박하게 하고 하층계급인 민중을 후하게
해야 한다'는 말 그리고 "맹자가 양혜왕이나 계선왕
2) 백성이 나라의 근본 에게 누누이 권한 것도 '보민제산의 이야기이다." 라 백마동래자기서
는 말에 이어서 그는 "《서경》에 이르기를 '가히 공문유화몽혼미
두려워할 이 민중이 아니겠는가 와 '민중이 바위와
인간이 인간을 지배통치하는 정치권력이 어디에서 같다'는 말을 반성하고 다스리라." 라고 하면서 남명 천매석주비범국
출발하여 누구에게 귀속 되느냐 하는 기준은 역사 과 마찬가지로 '민암을 말하고 권력의 원인자를 민 화상난야벽산루
적인 시대변천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또는 정치구 중으로 보고자 하였다.
조에 따라 다르게 주장되어 왔다. 동양과 서양을 막 남명은 또한 일반적 이론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인 황대주범모화항
론하고 정권의 소단위 정치구조로서 고대의 성읍국 역사적 사실과 혁명적인 정치적 사상을 피력한다.
가나 도시국가 에서는 권력자체가 노예를 제외한 그는 "걸주는 탕무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극포조성청조계
일반 민중들의 합의와 그 필요에 의해 추대되는 형 나라의 민중을 얻지 못한 데에서 망했다." 라 하여 고탑인귀유상재
식으로 도출되어, 왕이나 부족장에게 통치권한이 부 (맹자>의 <이루> 장과<진심> 장의 두 문장을 합해 금강기월영고저
여되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으 서 그의 사상을 주장한다. 이는 또한 민중이 국가와
가진 왕이나 부족장은 그것을 갖도록 한 민중에게 임금보다 귀하기 때문에 민중에게로 귀속되고 민중 백마가 동쪽으로 오고 자주색은 서쪽이라 과 허황후가 합혼 한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고 사
당연하게 그들을 위해 정치를 하여야 하는 의무를 을 위하는 정당한 권력에 민중 스스로가 마음에서 자를 보내어 근처에 있는 평전10결을 삼보를 공양하는
진다. 그리고 그 의무를 소홀히 한 통치자는 당연히 부터 인정할 때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도 어린 화상의 꿈 혼미하여라.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절이 생긴지 500년 후에 장유사
정권의 정통성과 통치행위의 정당성이 없어지므로 남명은 보다 후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인용 공주의 돌배는 비단 돛으로 나라에 들어 왔고 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가 도합 300결이나 되었
선거나 추대 혹은 방별의 방식에 의해 다시 새로운 하면서, "한나라 유계(회주:유방)는 소민이었고 진 화상의 절은 푸른산의 누각이다. 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은 왕후사가 장유사의 시지 동
통치자로 대치될 수 있다. 나라 이세(호해)눈 대군이었다. 거친 대의 낮 염불은 꽃의 목을 본 뜬 것이요 남쪽 구역 안에 있다 하여" 이 기록에서 장유사의 창건
조선 중기 당시 사림파는 선왕지도에 입각하여 도 그런데 필부가 만승으로 바뀌었으니 대권은 어디에 포구 끝 물소리는 시냇물로 돋구어 듣는다. 은 951년이고 그 위치도 지금의 장유사와는 맞지가 않
학정치를 실현하고자, 먼저 유교의 정치적 이상인 있는것인가? 오직 우리 벅성의 손에 달려 있을 따 다. 특히 많은 세월을 이어온 장유화상의 불교 도래와
민중을 위한 정치로 민심과 그민중의 신뢰를 획득 름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히 정치권력인 옛 탑의 사람은 돌아가고 초상만 있으니 최초의 수도처였던 불모산의 장유암과 혼돈해서는 안될
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대권이 민중의 손에 달렸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불경의 옥같은 그림자가 높고도 낮다.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권32에도 ““김해도호부에
실천을 하였다. 그러나 수차례 훈척파의 공격으로 의 정치 사상에는 민본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정 장유산을 김해부 남쪽 40리에 있고 왕후사는 장유산에
사화를 당하자 현실에 대한 우환의식에서 출발하는 치사상의 기초적 요소가 함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장유암팔경 있었다."고 적고 있다. 장유산은 지금의 장유3동 장유리
민본사상이 이론화되어 관념적인 이기심성론으로 조선 중기 왕조 말기적인 사회현상과 정치적 불안 의 뒷산인 태정산(금)으로 『김해음지」 와 김정호의
변질되었다. 과 부정부패가 심하여 그 누구도 비판적인 언사를 1. 춘일망해-봄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대동여지도」에도 장유산으로 나온다.
남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사상적 혼란시 할 수 없었을 때 남명은 명종 10년(1555)<을묘사직 1980년대 이후 이 경치는사라졌다. 2천여년 전의 역사는 그 모태와 힘을 어버이로부터 이
기에 사회·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궁극적 정치소 소(일명 단성소)>에서 "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2. 추포로화-가을 포구에 핀 갈대꽃. 어온 이야기다.
재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였다. 그것은 《서경 잘못 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가고, 천의 가 이 경치 역시 19800년대 이후 사라졌다. 구전이요, 전설이 역사서의 밀알이다. 구전을 전설을 수
> 과 《맹자》, 《순자> 등에서 나타나는 민본적인 벌써 떠났으며 인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그것 3. 남포어화-밤에 횃불을 들고 남포에서 게를 잡는 모 집하고 다듬어서 만들어진 것이 기록이요 역사서임을
선진유학의 참모습으로 반본하는, 유학의 르네상스 은 비유컨대 마치 백 년 된 큰 니무가 그 속은 빌 습, 이 경치 역시 시만 남았다.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서양의 역사서와 세계사는
라 할 수 있으며 후일 조선 후기 실학의 경세제민 레가 다 파 먹었고 기름과 진액도 다 말랐는데, 회 4. 탑등조일-장유암에 밝힌 연등의 모습. 그렇게 만들어 졌다.
적 사회·정치사상과 직접 연결된다. 오리 바람과 폭우가 언제 닥처올지를 알지 못한 데 5. 하야송풍 - 여름밤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남명은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정치와 왕실에 대하 에까지 이른 것이 아득히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하 6. 동척설궁-겨울철 눈 내린 풍경이 중국 제나라의
여 <민암부> 에서 민중을 물 속의 바위 (암초)에 였다. 당시에 왕의 정치행사가 민중에게 근본을 두 왕궁 같았다는 비유.
비유해서 읊었다. 그는 '염에되 양자강 구당협 입구 지 못하여 민심과 천의가 떠났다고 직접 왕에게 상 7. 금릉야경순-김해부의 밤 경치.
에 있는 돌 무더기로 물 밖으로 수십 장 솟아 있는 소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왕권과 왕 8. 구포귀법- 구포에서 고기잡던 배들이 돌아올 때의
데 지나가는 배들이 자주 여기에 부딪혀 좌초한다 위 자체를 비판한 죽음을 무릅 쓴 직언이었다. 왜냐 모습.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문신들이 남긴 기문과 시 속에
고 한다.)'에 배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또한 이 곳에 하면 이는 당시 유교국가에서 민심이 떠나고 천의 서 아름다운 어제의 김해를 오늘에 그려본다.
서 전복되기도 한다고 하여 민중에 의해 킨력자체 가 옮겨졌다면 혁명을 해노 가하고, 그 나라는 이미 -본문중에서-
가 바뀔 수 있음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존재하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 김종간의 미친 소리 스물 두 번째
는 지리적 사물을 이용하여 비유적으로 주장한다. 교정치사상에서 민심의 향배는 국가의 존망과 왕조
그리하여 남명은 "민중이 물과 같다 함은 옛날부 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당 장유암을 찾아 동남쪽으로 푸른 산을 헤치고 옛 김해평
티 있는 말이다. 민중은 임금을 모시지만 나라를 뒤 시 민중이 어육이 된 현실을 직재하게 비판한 것은 야를 보며 "장유암 팔경"을 읊어본다. 황사 미세먼지라
엎기도 한다." 라고 순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즉 물 유교정치사상의 핵심을 거론한 것이 된다. 는 환경오염으로 그 옛날의 멋과 맛은 느낄 수 없지만
이 있어야 배가 떠서 다닐 수 있다. 민증이 있어야 장유암 주변의 녹색 풍광과 솔바람은 길손을 연화세계
임금이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로 착각하게 한다. 장유암은 언제 누가 창건했을까? 다음호계속>>>
그러나 물이 배를 뒤집을 수 있듯이, 민중을 위한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장유사가 옛 장유사라고 말하
정치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쫓겨날 수 있다 는 이도 있지만 필자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옛 장유사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호계속>>> 에 대한 기록을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수
제자인 정인홍도 《서경》의 '민중이 오직 나라의 로왕의 팔대손 김질왕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
을 숭상하여 세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
자 했다. 이에 원가 29년인 임진년(서기 452)에 수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