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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 1 Dubois and Washington
: Two Great African-American Leaders
퍼거슨 판결과 '엉클토미즘'
그에 따라 남부에서는 흑인 수난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헤이즈 대통령이 남부로부터 연방군을 철수시키자,
흑인들의 처지는 급속도로 위험해지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주들은 헌법 수정 조항 제15조에서 보장된 흑
인의 참정권을 빼앗기 위해 인두세(poll tax), 문자 해독 테스트, 재산 자격과 같은 제약을 부과하였다. 그
리고 각 주는 흑인 차별법(Jim Crow Laws)을 제정하여 흑인을 사회에서 격리시켰다.
대법원도 남부의 편이었다. 1883년의 판결에서 대법원은 흑인의 시민권을 인정한 헌법 수정 조항 제14조
의 적용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주 정부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흑인 차별을 허용한 것으
로서, 1875년의 민권법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흑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흑백 차별을 인정한
1896년의 '플래시 대 퍼거슨 판결(Plessy v. Ferguson)'이었다. 그것은 흑인을 '격리시키더라도 동등한
(separate but equal)' 시설만 제공해 준다면 합법적인 것이라고 판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898년의 '
윌리엄스 대 미시시피 판결'은 흑인 참정권의 박탈을 정당화시켰다.
북부의 여론도 흑인 차별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당시 북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인종주의 사상이 유행하
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부 흑인들이 북부로 이주해 오는 데 대한 반감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제 흑인들은 북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한 자립 운동에 앞장선 흑인 지
도자가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이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흑인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흑인은 우선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흑인의 경제 자립을 돕기 위해 앨라배마에 터스키기 기술 학교(Tuskegee Institute)1)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흑인들이 흑백 평등의 즉각 실현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백인 우월 체제를 받아들이
는 데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타협적인 태도였다.
워싱턴의 타협 정신은 1895년의 애틀랜타 목화 박람회에서 행한 유명
한 '손가락 연설'에서 나타났다. "흑인과 백인은 손가락처럼 갈라져 있
다. 그렇지만 서로의 발전을 위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고 그는 말
하였다. 나중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태도를 가리켜 백
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톰 아저씨의 생각(Uncle Tomism)'이라고 비
판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흑인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흑인을 제2급의 시민으로 깔보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
이 선택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은 흑인의 지위 향상은 민권 운동이 아닌, 기술 교육을
통한 경제력 향상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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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o Great African-American Leaders
퍼거슨 판결과 '엉클토미즘'
그에 따라 남부에서는 흑인 수난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헤이즈 대통령이 남부로부터 연방군을 철수시키자,
흑인들의 처지는 급속도로 위험해지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주들은 헌법 수정 조항 제15조에서 보장된 흑
인의 참정권을 빼앗기 위해 인두세(poll tax), 문자 해독 테스트, 재산 자격과 같은 제약을 부과하였다. 그
리고 각 주는 흑인 차별법(Jim Crow Laws)을 제정하여 흑인을 사회에서 격리시켰다.
대법원도 남부의 편이었다. 1883년의 판결에서 대법원은 흑인의 시민권을 인정한 헌법 수정 조항 제14조
의 적용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주 정부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흑인 차별을 허용한 것으
로서, 1875년의 민권법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흑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흑백 차별을 인정한
1896년의 '플래시 대 퍼거슨 판결(Plessy v. Ferguson)'이었다. 그것은 흑인을 '격리시키더라도 동등한
(separate but equal)' 시설만 제공해 준다면 합법적인 것이라고 판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898년의 '
윌리엄스 대 미시시피 판결'은 흑인 참정권의 박탈을 정당화시켰다.
북부의 여론도 흑인 차별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당시 북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인종주의 사상이 유행하
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부 흑인들이 북부로 이주해 오는 데 대한 반감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제 흑인들은 북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한 자립 운동에 앞장선 흑인 지
도자가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이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흑인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흑인은 우선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흑인의 경제 자립을 돕기 위해 앨라배마에 터스키기 기술 학교(Tuskegee Institute)1)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흑인들이 흑백 평등의 즉각 실현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백인 우월 체제를 받아들이
는 데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타협적인 태도였다.
워싱턴의 타협 정신은 1895년의 애틀랜타 목화 박람회에서 행한 유명
한 '손가락 연설'에서 나타났다. "흑인과 백인은 손가락처럼 갈라져 있
다. 그렇지만 서로의 발전을 위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고 그는 말
하였다. 나중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태도를 가리켜 백
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톰 아저씨의 생각(Uncle Tomism)'이라고 비
판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흑인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흑인을 제2급의 시민으로 깔보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
이 선택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은 흑인의 지위 향상은 민권 운동이 아닌, 기술 교육을
통한 경제력 향상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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