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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교동교회
강화군 교동남로 432 https://blog.naver.com/gyodong-church
옛 교동교회
토마스 선교사 세상에서 제일 작은 강화교동 순례자의교회
현 교동교회
했다고 한다. 아버지 박기완은 교동 일대
“1865년 의 최고 부자여서 흉년 때마다 주민들을
토마스 선교사 먹여 살렸는데 아들 박성대가 예수를 믿
일행 탄 배 겠다고 하자 “야소교를 믿으려면 차라리
좌초해 상륙, 목숨을 끊으라.”고 칼을 주었지만 아들
극진히 대접” 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교동교회
를 다니다 교동교회가 어려움을 겪자 땅
을 기증하여 상룡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강화도를 이루는 섬 중에 교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그러나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
전한 사람은 강화도 홍의교회 교인인 권신일, 권혜 아 박성대, 박형남 부자는 그만 죽고 말
일 부자였다. 특히 권신일은 교동으로 아내와 함께 았다. 그러나 이들 가문은 낙심하지 않고
들어가 초가 한 채를 구입하여 살림집 겸 예배처로 박형남의 동생 박이남과 박기만이 계속
삼고 교동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워낙 주민 해서 교회를 충성스럽게 지켰다. 박기만
들의 반대가 심해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쉽지 않았 의 아들 박두성은 ‘맹인들의 세종대왕’으
지만 결국 교동 군수가 동의하자 많은 사람들이 교 로 불린다. 그는 시력을 잃어가면서까지
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교회가 성장하자 1904년에 점자를 만든 분이기때문이다. 평생 맹인
는 교회 옆에 동화학교도 세웠다. 1933년 교회를 상 교육에 헌신하면서 1926년 한글 점자를
룡리로 옮겼기 때문에 현재 교동교회는 폐허로 변 창제하였다. 상룡리로 가면 반드시 박두
했다. 당시에 지은 예배당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변 성의 생가도 보고 와야 한다.
한 것은 초가지붕이 양철지붕으로 바뀌어 있을 뿐
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상룡리에서 제일 먼저 교동교회 박두성 생가
신자가 된 사람은 박성대인데 그의 할아버지가 토
마스 선교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가
항해중 물이 떨어져 교동에 내렸을 때 극진히 대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