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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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의론에 대한 학계의 토론
칭의론, 곧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만’ 우리
가 ‘의인이라 칭함 받음’(곧 무죄 선언되고 의인의 신분을 얻음)의 교리는 사도 바울이 그
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선포하는 데 사용한 한 중심적 범주로서, 16세기 종
교개혁자들에 의해 그것이 재발견됨으로써 유럽에서 하나의 종교적 혁명을 일으켰고, 유
럽과 북미주 그리고 점차 전 세계에 걸쳐 개신교적 영성과 문화를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신교의 표징 교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성을 잘 드러
내 믿는 자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assurance)을 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윤리에 대해 소홀
하게 하는 단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여러 단계들
이 있다는 ‘구원의 서정론’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그리고 소명으로 시작되는
구원을 얻게 된 믿는 자는 먼저 ‘칭의’를 받고, 그 이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성화’의
단계를 거쳐, 최후의 심판에서 칭의가 확인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영화’)고
가르침으로써, 칭의 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서정론’은 사도 바울이 ‘성화’라는 말을 ‘칭의’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세례 때의 구원의 시작점에도 적용하고, 최후의 심판 때 있을 구원의 완성점에도
적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들로서, 법정적 그림 언어인 ‘칭의’가 인
간의 근본 문제인 죄를 ‘하나님의 법을 거스름(transgression)’으로 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것으로 볼 때 적용하는 구원론적 언어인 반면, 제의적 그림 언어인 ‘성화’는 죄를
‘세상에 오염됨, 더러워짐(defilement)’으로 보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볼 때 적용하는 구원론적 언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더구나 ‘구원의 서정론’은 ‘칭의’와 ‘성화’를 구조적으로 구분되는 구원의 두 단계들로 설정
하며 동시에 예정론/성도의 견인론도 함께 가르치는 교리이기에, 많은 목사들이 개신교의
표징으로 보는 ‘칭의론’을 강조하되 예정론/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해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성화론’은 유명무실하게 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된 칭의론이 윤리, 곧 의로운 삶이 없는 칭의론, 심지어 의로
운 삶을 방해하는 칭의론으로 변질되자, 19세기 말부터 슈바이처(Schweitzer)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그 구원론의 한계성이 많이 지적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19세기 말부터 성경학자들이 성경에서 ‘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의미를 가지
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바울의 칭의론도 법정적 의미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의미로도, 즉 ‘무죄 선언받음’의 뜻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의 뜻으로도 해석해야 함을 점차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1960년대 케제만(Käsemann)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
(Lordship-transfer)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사탄의 나라에서 구속하
여 자신의 나라로 회복시킴, 그리하여 우리 피조물들이 이제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게 함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1970년대 말에 나온 샌더
스(Sanders)의 유대교에 대한 새 연구에 근거하여 던(Dunn), 라이트(Wright) 등에 의해 전
개된 ‘바울신학에 대해 새 관점을 갖기 운동’이 칭의론을 이방인들이 모세의 언약/율법 체
계에 들어옴이 없이, 즉 유대교로 개종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교리로, 즉 주로 교회론적으로 해석하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