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교화연구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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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신을 위해서입니다. 보문품을 읽는 공덕은 아이가 아닌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
              기 때문입니다. 보문품을 읽는 동안 불안한 마음은 가라앉을 테고, 결국 마음의

              안정이라는 실질적인 효용은 본인에게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아이의 일
              은…. 사실 모르는 일입니다. 보문품을 읽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괜찮아질지, 혹

              애초부터 팔을 잡아끈 그 일이 아무런 일도 아닌 여자아이들의 장난이었는지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은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모르는 일은 모르는 일로 남겨두면 됩니
              다. 그 모르는 일을 공연히 상상하고 예측하여 ‘앎’의 일로 만들면서부터, 두려

              움과 긴장이 찾아오고 저녁도 못 먹게 되고, 그래서 <관세음보살 보문품>도 읽
              게 되는 등 여러 유위有爲의 일들이 필요 이상으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모르는 일은 모르는 일로 남겨두면 좋습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명백히 알
              아야 할 것은 남을 위한 많은 일들이 실상은 나를 위한 일이라는 자각입니다.

              아이들이 팔을 끌고 간 장면을 본 것도, 이런저런 안 좋은 상상을 한 것도, 그로
              인해 불안함이 밀려온 것도, 불편한 마음에 밥을 못 먹은 것도, 불안함에 <관세

              음보살 보문품>을 읽은 것도, 보문품을 읽으며 마음이 안정을 찾은 것도, 그 시
              작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이 나의 일이었다는 자각입니다. 그리고 이 자각이 나

              와 남이라는 분별을 넘어서 투명한 분명함으로 들어설 적에,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니게 됩니다. 그 아이들이 나입니다. 팔을 붙들고 간 모습도 나입니

              다. 그 모든 상상도 나입니다. 불안함도 나입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도 나입
              니다. 보문품을 읽음도 나입니다. 안정감도 나입니다. 다 나입니다. 상대방도,

              세상도, 시간도, 그 모든 일도 다 나이고, 그 모두가 나의 일입니다.
                 예전에 ‘부처가 부처를 보내,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의 제일 마지막 구절은 다음
              과 같습니다.



                ‘당신이 당신을 보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 원제스님의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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