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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공보 1회가 되었고, 이경우의 장남 이봉의(李鳳儀)는 명신학교 3학년 때 오산공보로 편입하여 3                                        189
                  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오남과 이봉의는 변기태와 변기재와 같은 학년 동기동창이었다. 오산장에서                                            역사

                  장사하던 김주경(金周卿)의 장남 김흥남(金興男)과 2남 김귀남(金貴男)은 모두 명신학교 1학년을 마                                          /  유적
                  치고 오산공보에 편입한 경우였다.

                    일본인소학교 4학년을 마치고 오산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제1회 졸업생인 김재웅(金在                                            · 유물
                  雄, 1894년생)의 보증인은 상업을 하는 종조부 김명현(金明鉉)이었다. 청호면 4동(오산리)에 거주하

                  는 김명현은 가난한 일가 친족에게 매년 세시에 각종 먹거리와 돈과 곡식을 보내고, 봄가을 춘궁기에
                                                                                   25)
                  도 구제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 까닭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김명현의 자선사업은
                  동족의 친척을 넘어 이웃에게도 향하였다. 김명현은 김광문(金光文), 이병선(李秉先) 등과 함께 다수
                                                                                             26)
                  의 쌀가마를 출연하여 오산장 내의 빈궁한 집에 나눠주어 사람들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김명현은
                  오산장에서 장사를 하였던 인물로 사립 명신학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편 『졸업자 학적부』에는 1914년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따른 혼란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

                  적부 주소란은 청호면(晴湖面)이 성호면(城湖面), 어탄면(漁灘面)이 동탄면(東灘面)으로 정정되어 있
                  고, ○○동(洞)이 ○○리(里)로 정정되어 표기되고 있다. 그러나 성호면 독리(篤里)는 어탄면 독동(篤

                  洞)을 의미하는데, 실상은 성호면 궐리(闕里)가 정확한 표현이다. 어탄면 은포리(隱浦里)는 학적부에
                  서만 보이는 표기 방식이다. 어탄면 위포(圍浦)를 뜻하는데, 위포=원포=은포라는 입말을 한자로 표

                  기하는 방식의 차이로 동탄면 금곡리(金谷里)가 맞는 표기지만 당시 1914년 행정구역의 변화가 일상
                  생활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혼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제3절    기차의 출현과 오산의 근대적 변화


                    경기도는 조선시대 양주와 광주를 중심으로 한강을 기반으로 한 양반세력들이 주요한 세거지(世居

                  地)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삼남대로의 변화와 정조 때 화성 축성 이후 한양과 수원을
                  잇는 수원로(水原路)가 개설되면서 남북 축이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화성이 있는 수원은 광주를 제치고 삼남(三南)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정조에 의해
                  수원으로 가는 원행이 빈번해지고 1795년 시흥을 통해 수원으로 오는 수원별로(水原別路)가 개설되

                  면서 수원은 삼남으로 가는 대로로 발전하였던 셈이다. 물론 이전부터 수원로는 전통적인 8대로(大
                  路) 가운데 하나인 제주로(濟州路)의 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즉 수원을 거쳐 전라도 해남까지 가는 노

                  선이다. 한강에서 양재를 거쳐 판교- 용인- 김량장을 거쳐 오산으로 가는 길도 주요한 통로였다. 수
                  원 읍치가 북쪽 팔달산으로 이동하기 전 구읍치에 있을 때 서울에서 남쪽으로 빨리 가고자 하는 경우

                  수원읍치를 거치지 않고 유천(버드내)를 지나 죽미고개를 넘어 오산으로 곧장 가는 경우가 많았다.




                  25) ‘金씨頌聲’, 『대한매일신보』 1907. 7. 18.
                  26) ‘三氏慈善’, 『황성신문』 191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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