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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설교는 명진학교 설립에 정한교와 현림(玄林) 두 사람의 공로를 치하하고 있다.
한편 1907년 같은 오산리에서 일신학교(一新學校)가 학생 50여 명을 모집하여 새롭게 시작되었다.
水原郡 烏山里에 有志諸氏가 發起고 義捐數千餘圓을 募集야 학校을 設立고 熱心敎授
야 將就지望이 有 中에 該校 학員 金應瑞氏 年今 拾七歲인대 金貨二百圓을 自願出義
야 一般학徒 五十餘名에 帽子를 獨擔하야 一切斷髮얏다더라.
수원군 오산리 유지들이 발기하여 의연금 수천 원을 모집하여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열심히 교육하
였다. 장래 희망이 보이는 중에 학교 학원 김응서(金應瑞, 17세)가 금화 200환을 스스로 의연하여 50
여 명의 학도들의 모자를 온전히 부담하고, 모두 단발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0)
일신학교는 1908년 학생수가 증가하여 주간 4개반(갑·을·병·정)과 야간 1개반으로 이루어진 규
모가 제법인 학교로 성장하였다. 1909년 1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시험을 보았는데, 갑반(甲班) 우등생
은 김열규(金圭烈) 송건섭(宋建셥) 등 3명, 을반(乙班) 우등생은 정진현(鄭진鉉) 조금옥(趙金玉) 등 3
명, 병반(丙班) 우등생은 김순천(김順天) 정기현(鄭基鉉) 등 3명, 정반(丁班) 우등생 김학주(金학周)
이건득(李建得) 등 3명, 야학과(夜學科) 우등생 이섭(李셥) 오준경(吳俊景) 등 3명이었다. 21)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의 자강운동에 눈뜬 시장 상인들은 사립학교 설립과 학교 지원에 적극적으
로 동참하면서 새로운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배워야 한다는 강한 향학열에 더하여 시장 상
인들의 상업적 지식의 습득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이유에서 자식들에게 근대적 학문을 요구하게 되었
다. 이러한 흐름은 1907~1908년 오산리 위아래 마을에 각각 명진학교와 일신학교가 존재하게 된 이
유였다.
오산리 위아래 마을에 각기 명진학교와 일신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에 효율
적인 학교 운영을 위하여 두 학교의 통합논의가 1908년부터 진행되었다. 이는 1908년 8월 공포된 「사
립학교령」 때문이었다. 민족교육을 하는 사립학교를 억압하기 위해 학교 설립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학교 폐쇄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했다. 결국 통감부는 사립학교 인가제를 통
해 학교 설립 기준을 높여 조선인 학교를 세울 수 없도록 만들고, 기존의 학교들도 기준에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폐쇄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1909년 4월 말까지 인가를 신청한 1,708개 학교 가운데
인가를 받은 곳은 242개교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산리 2개 학교는 교실 규모와 교사 수
등에서 인가를 위한 통합 운영을 고민하고 이를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산시사
水原郡 烏山上下동 合二百餘戶 中에 私立明進학校와 私立壹新學校가 幷立야 上下洞居人
이 各其義務로 負擔敎育하더니 近日에 共同協議고 該兩校를 統合야 壹校를 完全히 組織
제
2
권
20) ‘김씨연보’, 『대한매일신보』 1908. 1. 5 / ‘捐帽斷髮’, 『大韓每日申報』 1908. 1. 5.
184 21) ‘壹新冬試’, 『대한매일신보』 1909.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