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9 - 제2권_Neat
P. 179
3)
모여들었다. 이들이 오산지역의 선비정신을 이끌었던 셈이다. 179
역사
제2절 대한제국기 오산지역의 자강운동 / 유적 · 유물
1. 의병투쟁과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7년은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격변의 해였다. 고종황제의 퇴위와 순종황제
의 즉위, 헤이그 밀사사건과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고양되는 시기였다. 이에
지주와 자산가들 역시 그들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여 집단적 대응에 나서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4)
지주,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궐리사 중건의 정신사적 흐름은
의병활동과 국채보상운동 등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산지역의 의병과 관련하여 뚜렷한 활동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독산성에 위치한 보적사(寶積寺)
가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주목된다. 전통시대 전쟁과 민란에서 사찰은 중요한 근
거지로 활용되었다. 특히 갑오농민전쟁 때 산간에 위치한 사찰의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사찰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숙박할 수 있는 건물이 있고, 식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사찰이 의병의 근거지가 아니라도 이동 중 숙식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동시에 식량과
짚신 등이 징발 대상이었고, 의병투쟁을 위한 정보의 취합처이자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5)
1907년 7월 서울 사는 김재선(金在善, 24세)·송주상(宋柱祥, 22세)·김태동(金泰東, 20세) 등은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 등을 통해 접하고 “지금 나라 형편이 쇠퇴하고 국권이
미진하니 국민된 자로서 입을 다물고 잠잠히 보아 넘길 수 없다”며 의병에 가담할 뜻을 갖고 함께 서
울을 떠나 수원 ‘산성사(山城寺)’에서 머물렀다. 산성사는 독산성의 보적사(寶積寺)를 일컫는다. 이곳
에서 수원사람 강춘선을 만나 용인의 남상목(南相穆)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의병이
되고자 하여 사찰을 찾았고, 그곳에서 또 다른 동지에 의해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
라서 사찰은 의병에 대한 보급의 근거지이기도 하지만 의병 모집을 위한 거점이기도 했다. 이들은 남
상목 의병진에 합류한 뒤 충북 음성에서 일본군과 전투에서 패퇴하여 30여 명과 더불어 죽산 칠장사
에 도착하여 100여 명의 규모를 지닌 전봉규(全奉奎)·민병찬(閔丙贊) 의병진에 합류하여 안성을 함
6)
께 공격하고 있다. 즉 독산성 보적사와 죽산 칠장사 등의 사찰은 의병의 근거지이자 일본군 공격을
위한 둔취장소이기도 했다. 한편 1900년 “陰曆本月初三日 水原鼇山場市에 火賊 幾十名이 突入야
3) 심재성, 「오정 심주택 선생 재조명」, 『오산의 뿌리를 찾아서』, 오산문화원, 1996, 130~131쪽.
4) 김형목, 「한말 수원지역의 계몽운동과 운영주체」, 『대한제국기 경기도의 근대교육운동』, 경인문화사, 2016.
5) 한동민, 「의병전쟁기 불교계의 현실인식과 대응」,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 7-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2)』, 불교사회연구소, 2018.
6) 「판결서 형(刑) 제46호」,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 Ⅰ』, 행정안전부·국가기록원, 2011, 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