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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된 양주가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고 인주·강화현 등과 함께 다시 남경의 관할 93
하에 영속되게 되었다. 물론 수주가 남경의 관할지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다른 주와는 달리 지 역사
수주사가 설치되어 본주 아래 안산현(安山縣)·용성현(龍城縣)·정송현(貞松縣)·진위현(振威縣)· / 유적
양성현(陽城縣) 등 7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즉, 『고려사』 지리지 양광도 수주조에는, “안산현(安山縣)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인 · 유물
데 신라 경덕왕이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안산군(安山郡)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본
수주(水州)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감무를 두었다가 충렬왕 34년에 문종이 탄생한 곳이라는 이유로 지
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영신현(永新縣)[오타(五朶) 또는 영풍(永豊)이라고도 한다]은 현종 9년에
본주에 소속시켰다. 쌍부현(雙阜縣)은 옛날의 육포(六浦)로서 현종 9년에 본주에 소속시켰다. 용성현
(龍城縣)은 원래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차홀(車忽)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은 차성(車城)으
로 고쳐서 당은군(唐恩郡)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으며 현종 9
년에 본 주에 소속시켰다. 정송현(貞松縣)은 옛날의 송산부곡(松山部曲)으로서 현종 9년에 지금 명칭
으로 부르고 본 주에 소속시켰다. 진위현(振威縣)은 원래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옛날의 연달 부곡
(淵達部曲)인바 금산현(金山縣) 또는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
칭으로 고쳐서 수성군(水城郡)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소속시켰고 명종 2
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후에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양성현(陽城縣)은 원래 고구려의 사복홀
(沙伏忽)인데 신라 경덕왕은 적성(赤城)으로 고쳐서 백성군(白城郡)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
려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5년 (1015)에 본주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5년(1175)에 감무를 두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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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 되어 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 데는 군사나 사회·경제적 측면을 고려한 현실적인 이유보다는 지리도참
설에 대한 문종의 혹신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경이 승격된 지 얼마 지나지 않
아 다시 주(州)로 환원되어 버린 것도 사실은 기대했던 지덕의 효험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
종 때에 이르러 양주가 남경으로 재차 승격되면서 경기 지역을 제외한 근기(近畿) 지방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숙종은 이때 단순히 양주의 행정상의 명호만을 올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위위승동정(衛
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동왕 즉위년에 올렸던 남경건도(南京建都)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곳에 크
게 궁궐을 짓게 하는 등 천도하는 땅으로서의 경영에 착수했다.
남경 건설은 1101년(숙종 6) 10월에 시작되어 9년 5월에 궁궐이 낙성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때 남경의 사지(四至)는 동으로는 대봉(大峯: 낙산), 서로는 기봉(岐峯: 안산), 북으로는 북악(北嶽),
남으로는 신룡산(新龍山)의 남단에 이르러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 범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남
경 관내에는 직할지인 3개의 속군과 6개의 속현 외에 일종의 관할지인 영군현으로 안남도호부(安南
都護府) 수주(樹州)와 지사군(知事郡)인 인주(仁州) 및 수주(水州) 그리고 현령관인 강화현 등이 포함
되어 있었다.
4)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楊廣道 水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