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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설치된 남경은 문종 때의 그것과는 달리 명호가 격하된다거나 관할 범위가 축소되는 일도
없이 충렬왕 말기까지 약 200년 동안이나 존속될 수 있었다. 남경이 지덕(地德)의 효험을 가져다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오랫동안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외의 우환에 말려 고려의 사회 정
세가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즉 통일의 기운을 탄 북방여진의 군사적 압력, 이자겸의 변, 서경
의 묘청의 난, 무인의 난과 그에 이은 무인정권의 성립, 6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 등으로 조정에서는
기존 지방관제의 개편에 눈을 돌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수주의 속현인 진위현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고 뒤에 격을 올려서
현령관(縣令官)을 두었다. 이로 미루어 진위현은 수원의 남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 중시된 곳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수주 지방의 지명으로 『고려사』에 보이는 정곡촌(廷谷村)도 수원 또는 오산지역과
밀접한 곳의 명칭으로 여겨진다. 5)
또한 수주는 몇 차례 명호상의 변경을 가져왔지만 남경의 한양부로 개칭, 격하되는 충렬왕 말기까
지는 대체로 남경의 관할 영군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수주가 수원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1271년(원종 12)의 일이었다. 이 해에 착량(窄梁)을 지키고 있던 몽골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침노하고 노략질하자 섬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몽골 군사를 죽이고 반란
을 일으켰다.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쳐 평정하자 그 공로로 도호부로 승격시
켰다는 것이다. 6)
대부도민들의 반란을 토벌한 부사 안열(安悅)의 공으로 도호부가 된 수주는 얼마 후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수원도호부의 목으로의 승격은 아마도 인근 안남도호부 수주와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
를 각각 길주목(吉州牧),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시켰던 1308년(충렬왕 34)의 지방행정구획 개편 시
기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이해 6월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이른바 그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대
대적인 지방행정구획의 개편을 실시하였다. 이때의 개편에서 남경은 한양부로 개칭, 격하되었고 그
장관도 유수에서 부윤으로 강등되었다. 남경과 함께 3경을 구성하고 있던 서경 및 동경이 각각 평양
부와 계림부로 격하됨으로써 3경제 자체가 아예 소멸되어 버리는 것도 이 개편이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남경은 하나의 부(府)로서 인근의 영군현을 상실하고 직할지인 속군현만을 다스리는 지위로 전
락했다. 이후 한양부는 1356년(공민왕 5)에 남경으로 승격되었다가, 동왕 11년 다시 환원되는 등의 변
화를 겪고는 있었으나 경으로 승격되어 있던 6년여 동안 수원부·부평부·인주 등이 과거처럼 그 영
군현으로 편입되어 관할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오산시사 수주목이 1310년 수원부로 격하된 이후 1362년(공민왕 11)에는 수원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수원
부민들이 항복을 권유하는 홍건적의 선봉을 맞아 가장 먼저 투항했다는 『고려사』 등의 기록은 바로 2
차로 침입한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킨 뒤 각지를 초유(招諭)하던 때의 일일 것이다. 즉, 1362년 홍건
제
2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양광도의 주군(州郡)에게 항복하기를 권유하자 수원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권
5) 『高麗史』 권56, 志10 地理1 楊廣道 水州.
94 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9, 수원도호부 건치연혁 및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수주 및 권27, 세가27 원종 12년 2월 辛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