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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행정
제9장 지적
차안병│전 오산시 지방기술서기관
우리나라의 지적에 관한 사항을 멀리 1910년 한일합방 이전의 구한말 토지조사사업과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의 일제하 토지조사사업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으며, 최근 오산시 지적의 현대화를 위한 사
업추진현황과 오산시 지적행정기구와 지적현황 한국국토정보공사 오산시지사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제1절 구한말 토지조사사업
1.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고려나 조선에 있어서도 토지국유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토지의 사적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조선중엽 이후 양반사회의 개인 토지를 인정함으로써 비롯
된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토지의 개인적 소유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1800년
대 말기의 양전제도는 토지측량에 대한 기술이 유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전사무에 종사하는 관리들
의 농간으로 실지측량결과를 임의 증감하는 예가 있어 지적사무가 기본이 된 공부가 극히 불완전하
였기 때문에 토지소유권은 항상 불안한 환경속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때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의 구별마저 혼돈하므로 억울하게 토지를 약탈당하는 농민도 한 두 사람이 아니었기에 토
지소유권에 대한 분규는 그칠 줄을 몰랐다. 1)
따라서 이로 인한 토지제도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토지를 관리하는 관청이 생겨 양지아문과 지계
아문을 비롯 1910년 구한말 정부의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토지조사법을 제정하였다.
1) 한국지적사, 1977. 11. 1, 원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