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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4대 국회의원선거


                    제4대 국회의원선거는 1958년 5월 2일 실시됐다. 혁신정당인 진보당을 이끌던 조봉암이 간첩사
                  건으로 처형되고 정계는 자유·민주 양 보수정당구도로 재편되었다. 자유당은 233개 선거구 가운

                  데 219명을 공천하고 민주당은 197명을 공천하였다. 여기에 357명의 무소속이 참여하여 전체 후보는
                  841명, 경쟁률은 3.6대 1이었다. 이전 총선거에 비하면 경쟁률은 매우 낮은 편이어서 정당체제가 점

                  차 안정화되어가는 징후로 평가할 수 있다.
                    전국 투표상황을 보면, 233개 선거구, 7,148 투표구에서 총선거인 1,016만 명 가운데 892만 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87.8%였다. 경기도에서는 25개 선거구 768개 투표구에서 총선거인 118만 8,695
                  명 가운데 104만 8,722명이 투표하여 91.6%의 투표율을 나타냈으며, 25개 선거구에 88명이 입후보

                  하여 경쟁률은 3.5대 1이었다. 화성을구에서는 현역의원 최병국을 비롯하여 모두 6명이 입후보하여
                  혼전양상을 빚었다. 이전에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었던 서태원, 홍봉진 외에도 공군준장 출신의 신

                  동우와 최병규, 박광병 등이 도전하였다. 특징적인 사실은 점차 화성 외부에 거주하는 후보자들의 수
                  가 증가한다는 점이다. 선거전의 전망은 자유당의 최병국과 민주당의 홍봉진 간의 대결로 보았는데,

                  선거결과는 홍봉진이 차점자인 신동우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여당인 자유당 공천자이자 현역의원이
                  야당후보에게 참패한 사실에서 화성군 을구 유권자들이 종전의 여당지지에서 야당지지로 선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4·19혁명과 이승만 정권 붕괴의 전조가 이미 각 지역구에서 나타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제4대 국회의원선거 후보별 인적사항 및 득표상황

                   정당명    성명    성별 나이            주소           직업          학력            경력       득표수
                   민주당    홍봉진    남   55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저술업        성대법대           고대교수      14,542

                   무소속    최병규    남   60       수원시 신풍동         농업          보졸         면서기, 경찰관     2,330
                   자유당    신동우    남   43    서울시 영등포구 흑석동       무직       청주대법대           공군준장      10,495
                   자유당    박광병    남   45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        농업       명대정경학부           면장        2,443
                   자유당    서태원    남   40    화성군 동탄면 장안리        농업       고대법정학과        고등공민교장       8,117
                   자유당    최병국    남   58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2가      민의원    와세다대 정외과 3년      3대 국회의원      4,141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후 2년 동안 정치는 극도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1956년 정·부

                  통령선거에서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은 1960년 5월 중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정·부통령선
      오산시사        거를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도미하는 틈을 타서 2개월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하였다. 2월 28일 선거

                  이전부터 야당 선거유세를 방해하면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발생하였고, 내무장관 최인규의 지
                  휘로 관을 동원한 부정선거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4월 11일에 마산에서 고등학생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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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군이 학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지속된 시위는 급기야 4월 19일에 경찰의 발포로 인해 학생 120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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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하고, 7,000명이 부상하였으며, 600여명이 연행되는 참상을 빚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무위원의

                  사퇴, 이승만의 하야, 11명 국회의원의 의원직 박탈 등이 이어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의 장기집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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