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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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청호역(菁好馹)이 나란히 표기되었다.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과 오산시 청호동이 그 장소였다.
5) 오산(烏山)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왕은 몽골과의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후 1232년
~1270년까지 39년간 강도(江都)는 고려의 도읍이었다.
오산(烏山)이란 지명은 『고려사절요』 고려 원종(元宗) 원년(1260년)에 처음 등장한다. 고려가 몽골
의 간섭을 받던 시기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자 왕식(王植)이 몽고(蒙古)의 사신 속리대(束里大)와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갔다. 속리대는 태
자의 의중을 떠보고자 먼저 가기를 청하였다. 태자는 그를 믿고 먼저 승천궐(昇天闕)에 들어갔다. 속
리대는 크게 노하여 나가서 벌판에 주둔하였다. 태자가 성에 들어오기를 청하니 속리대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피차간의 뜻이 다르니, 나는 돌아가고자 하오.’라고 하였다. 을유(乙酉)에 속리대가 오산
(烏山)으로 물러나 주둔하니, 태손(太孫)이 강화(江華)에서 와서 만났다.”
위의 기록에서 태손 왕거(王昛)가 속리대(束里大)를 만나고자 온 길은 경기만의 고려 뱃길로 판단
된다. 왕거가 고려의 수도 강화도(江華島)에서 왔다는 기록으로 유추한다. 그 길은 강화도-인천시-
대부도-남양만-독산성(禿山城)이었거나 강화도-인천시-대부도-남양만-아산만-황구지천의 다라
고비진(多羅高飛津)이었을 것이다. 이때 몽고의 사신 속리대는 독산성(禿山城)에 은거하여 몽골군을
지휘하였을 것이고 몽골군은 오산천과 황구지천 주변에 천막을 치고 주둔하였을 것이다.
1682년에 작성된 <동여비고(東輿備攷) 백제강역북변지도(百濟疆域北邊地圖)>는 오산천을 고산천
(孤山川)으로 표기하였다. 고산천은 곧 오산천으로 읽히는데 이런 현상은 고서의 기록에서 자주 보인
다. 예를 들면 고구려 매홀군(買忽郡)이 그것이다. 매홀(買忽)은 물골인 바, ‘골’의 ‘ㄱ’탈락으로 ‘올’이
다. ‘고’의 장음은 ‘고오’이고, 골의 장음은 ‘고올’이다. 그러므로 고산천의 ‘ㄱ’탈락음은 오산천으로 읽
히는 것이다.
1753년에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오산(鰲山)이란 지명이 나온다. 오산장이 3일과
8일(음력)에 열린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또한 오산(烏山)을 오산(鰲山)으로 표기한 일례에 불과하다.
이상의 고문헌으로 보아 오산은 烏山, 孤山, 鰲山 등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260년에 처음 烏山
이 쓰인 이후 760년의 전통을 이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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