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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여 궐리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전하며, 또한 궐리사 본당 창건 당시에 목수가 일을 하다가 대들
보 위에서 급한 김에 방뇨를 했는데 이를 본 감독관이 크게 노하여 치죄를 하려 하자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모여 폭우가 되어 쏟아지면서 목수가 방뇨한 오물을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씻어내려 모두가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15) 내삼미 용인 이씨 집안의 전설
옛날 용인 이씨 집안에 조선시대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분이 계신데, 어느 날 역
학지사(易學志士)선생이 마을을 지나다 들러 집안에 장사가 날 것이라고 하더니, 때마침 생남하였는
데 이 아이가 날 때부터 이가 났고, 겨드랑이 밑에 날갯죽지가 돋쳤으며 눈에서는 독특한 광채가 빛
을 발하였다. 집안 식구 모두가 기이하고 놀라 중추부사를 모시고 가족회의를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이 아기를 죽이기로 결정을 하였다. 처음에 아기를 잡아 뉘고 맷돌을 올려놓아도 죽지를 않아서 방치
돌을 올려 놓으니 아기가 말을 하기를 ‘왜 나를 죽이려 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너를 살려두면 삼대가
멸문하는 역적 집안으로 몰리니 어쩔 수 없다’고 한즉 ‘내가 살아도 역적은 안됩니다. ’하니, ‘네가 죽
어야 집안이 무사하다’고 하면서 죽으라고 이르니 ‘내가 죽어서 집안이 잘 되고 무사하다면 죽겠는데,
그냥은 절대로 죽지 않으니 저를 죽이려면 날갯죽지를 잡아 뽑아야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날갯죽
지를 뽑으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면서, 투구봉과 금반향지간의 산이 갈라지면서, 용마(龍馬)가 어흥
소리를 내며 달려 나와 동탄 구산(龜山)을 딛고 용인쪽으로 날아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 후세인들이 구산에 미륵을 세우고 빌었다고 하며, 동탄신도시가 개발되기 전까지 동탄면사
무소 옆 오산리에 돌미륵이 있었다. 돌미륵은 반송아트홀 야외음악당으로 옮겨져 있다.
(16) 서랑(徐娘)의 전설
벌음동에는 약 360여 년 전부터 이천(利川) 서(徐) 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서씨 문중에서
전설같이 전해오는 애달픈 이야기가 있다. 때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때의 일이다. 여진족인 후
금(後金)의 군대가 조선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는 중과부적으로 남으로 밀렸고 마침내 인조(仁祖)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몽진까지 하게 이르렀고, 후금군에게 60여 일을 항거했지만 결국 임금은 후금
의 장수 용골대에게 신하의 예로써 절하고 항복해야만 했던 치욕을 당하던 때이다.
벌음동 마을로 오랑캐(여진족)들이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부녀자에게 행패를 부리며 살생을 저
질렀다. 이 때에 벌음동에서 살던 서희장군의 후손인 서대감[徐鳳鶴公]이 부원수(部元帥)로 여진족과
오산시사
싸우다 전사를 하게 되었다. 이 서봉학공의 슬하에는 두 아들과 10대 후반의 아리따운 서랑(徐娘)이
란 처녀가 있었다. 두 아들도 여진족과 싸우기 위하여 출전했고 집안에는 부인과 딸인 서랑만이 있었
제 기 때문에 두 모녀가 서장군의 시신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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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랑은 인근에 인물 좋고 예절 바른 낭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랑캐들은 또 마을
을 뒤지며 부녀자들을 찾아 헤매다 서대감의 집앞에서 서낭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미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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