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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산지역에 대한 기록은 서울과 함께 수도권을 이루는 경기도 수원과 화성에 관한 기록을 통
해 파악될 수 있다. 오산과 수원이 속한 경기도는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분단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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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까지 격동의 시기를 보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 속에서 서울과 함
산업
께 수도권을 이룬 경기도에 속해 있다. 특히 해방 후 서울로의 인구 유입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한국
전쟁 이후 경제재건이 시작되면서 수원과 오산의 변화는 서울과 수도권의 변화에 직·간접적인 영향 · 경제
속에 있었다. / 보건
현재의 경기도의 기본틀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 경기란 원래 왕도(王都)의 외곽지역으로서 왕 · 환경위생
도와 왕실을 보위하고 왕실과 관청의 경비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을 지칭하며 한양 주변지
역이 경기에 해당했다. 조선시대 경기도는 수원, 광주, 개성, 강화 등 4 유수부를 포함, 37개 군현으
로 구성되었고 일제시대인 1914년 이후로는 2부 20군으로 유지되었다. · 사회복지
광무3년(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를 통해 당시 오산이 속한 수원군의 인구를 추정할 수 있
다. 1899년 당시 지금의 화성시와 오산시를 포함하는 수원군의 호구(戸口)는 1만 2,579호로 기록되어 / 사법
있다. 『수원군읍지』에서는 호구로만 기록되어 있고 사람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총인구나 남녀 · 치안
별 인구는 알 수 없다. 흔히 호구 당 인원을 3.5인~4인 정도로 보고 당시 수원군 인구를 추산하면 당
시 5만 2,182명의 인구를 가진 기흥읍이나 5만 3,693명의 이천읍 인구와 비슷하다. 참고로 성안에 사 · 소방
는 소위 양반계급이 956호, 성밖에 사는 상민(常民) 계급이 1만1,623호로 되어 있어 양반 대비 상민의 · 언론
비율은 7.5% 대 92.5%였다.
조선시대 오산이 소속된 수원도호부의 특산물은 5곡, 조, 팥, 참깨, 뽕나무, 삼(마), 지초, 약재, 송
어, 숭어, 민어, 농어, 뱅어, 상어, 쌀새우, 중새우, 큰새우, 굴, 낙지, 모시조개 등 곡류와 어류가 주
종을 이루고 있고, 화성 지역의 진상물로 생게를 들고 있다. 또 이 지역에 관한 최초의 인구수를 알
려 주는 자료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수원도호부의 경우 호수는 1,842호, 구
수는 4,926구이며, 군정의 경우 시위군이 197명, 선군이 405명이었다. 남양도호부의 경우, 호수 487
호, 구수는 778구, 시위군 2명, 선군 145명이었다.
구분 호수 총인구 남자 여자 출처
1454(단종2) 1,842 4,926 - - 『세종실록지리지』
1759(영조35) 14,696 55,680 28,373 27,303 『여지도서』
1789(정조13) 15,121 57,660 28,240 29,420 『호구총서』
1831(순조31) 14,588 58,041 30,183 27,858 『화성지』
1899(광무3) 12,579 49,708 27,632 22,076 『수원군읍지』
주: 조선시대 자료를 봤을 때 남녀 비율이 대체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구변화 또한 안정적이다. (『화성시사 8』, 17쪽)
한편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화성 지역에는 7개의 향시가 개설되
었다. 당시 남양부에는 2·7일장인 석현장, 읍내장, 1·6일장인 구포장, 4·9일장인 기지장이 있었
고, 수원부에도 2·7일장인 석현장, 4·9일장인 신기장과 사슬곶장, 5·10일장인 팔탄장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