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제5권
P. 107
오산은 이처럼 1949년 이전 수원군에 속해 있다가 이후 화성군의 일원이 되었다가 1989년에 별도
의 시로 분리, 승격되었기에 이전 시기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오산만을 다루고 있
105
는 독자적인 통계자료나 문헌은 최근의 시기만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산에
산업
관한 기록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수원군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고, 한국전쟁이후
1980년대까지는 화성군의 기록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오산만의 독자적인 기록은 대부분 1989년 시 · 경제
승격 이후 나타난다. / 보건 · 환경위생
제2절 일제 강점기 수원, 화성 지역의 상공업 · 사회복지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경시하는 문화와 전통이 지속되었기에 상업의
수준의 매우 낮았고 일제 식민지하의 1920년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상업은 물물교환이 주된 거래인 시 / 사법
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특별히 상업으로 발전된 지역이 없었고 당시 상업지로 손꼽힌 고장은 경 · 치안
성·평양·대구·인천·원산·군산·목포·신의주·마산·진남포·청진·금천·개성·수원 등이
었다. 이들 상업지들도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소매중심이었기 때문에 물자의 집산(集散)도 활 · 소방
달하지 못했지만 수원은 이 시기에도 나름 상업지로 이름을 올렸다. · 언론
일제하 오산은 수원군 내 하나의 면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현재 오산 지역의 경제상황은 수원 상공
업의 역사를 통해 살펴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수원군내의 경제 중심지는 지금의 수원이었고 오산도
수원과 함께 성장했다. 수원은 일제 식민지 이전인 1896년에 경기도의 도청소재지가 있는 지방행정
의 중심지였으며 해방후인 1949년에는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 수원은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먼저 경부선 철도 부설로 삼남지방의 물류가 몰려
드는 중간기착지가 되면서 시장기능이 활성화되었고, 권업모범장 설립으로 축만제 주변의 둔전들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농업은 수원을 대표하는 산업이었다. 가장 중요한 작물인 쌀의 생산현황을 보면 1922년 기준 쌀 재
배면적이 많은 면은 반월면, 안용면, 태장면, 우정면으로 1,300정보(약 400평) 이상으로 경지가 많은
지역이었다. 반면 수원면과 그 주변인 일형면, 의왕면 지역은 단보당 수확고가 높았는데 수원면의 생
산력이 높았던 이유는 일본인 대규모 농사회사인 동산농사주식회사의 동산농장과 국무합명회사의
국무농장의 소유지가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보리의 경우 1922년 기준 재배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이 태장면이었고, 반월면, 음덕면, 우정면, 안
용면이 6,000단보 이상의 경지가 많았다. 역시 단보당 수확고는 재배면적의 크기여부와 상관없이 송
산면이 900홉으로 가장 많았고, 의왕면, 봉담면, 비봉면이 높았다. 밀의 재배면적은 정남면, 음덕면,
동탄면, 성호면, 비봉면이 넓고 단보당 수확고는 봉담면이 850홉으로 가장 높았으며, 다음으로 일형
면, 양감면이 높았다, 대체로 쌀은 수원면, 태장면, 안용면이 높은 생산력을 보인 반면, 보리와 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