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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는데, 이것은 면적이 가장 많은 일반벼(수도작)가 수원군 전체의 단보당 평균생산량에 비해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당시에 수리시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적고 천수답이 많아 관개를 제대
                                                                                                                  45
                  로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밭벼는 오산의 단위면적당 평균 수확량이 7백97합으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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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른 지역보다 높아 수원군지역에서 상위권에 속하였는데, 수리시설이나 관개가 불필요한 밭벼의 생산

                  량이 높은 것은 수도의 쌀 생산량이 현저히 낮았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 오산의 농사는 대부                                          · 경제
                  분 일모작이었다. 홍수에 의한 잦은 침수로 황폐된 땅이 많았으며 경운은 주로 축우로 하였는데 하루                                           /  보건

                  3단 보(약 1,000평)정도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못자리는 지금보다 약 한 달가량 늦은 5월에 하였고                                     · 환경위생
                  적은 양의 기비(基肥), 유박(油粕) 등을 주어 파종하고 6월에 강우를 기다려 이앙하는데 이때 가뭄이

                  계속되면 모를 못 심어 흉년이 들곤 하였다. 그 시기에는 저수지 등이 불충분하고 수리시설이 제대로
                  없어 그해의 기상이 풍흉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개량영농과 관개시설을 통한 농법이 도입되                                            · 사회복지

                  고 수원에 있던 권업모범장(현재의 농촌진흥청)이 지원하여 수원지방의 영농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빨리 근대화되기 시작하였다. 오산지역도 이때에 미작기술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으                                            /  사법

                  로 생각된다.                                                                                         · 치안
                    그 당시 오산지역의 맥류재배 면적은 인접지역인 동탄면이나 태장면, 정남면보다 적은 6천2백91정

                  보였고 단보당 생산량도 보리가 3백46합, 밀은 3백80합으로 마도면, 봉담면, 우정면 등에 비해 월등                                       · 소방
                  히 적었는데 아마도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관개가 용이하고 토질이 괜찮은 곳은 대부분 논농사를 하                                          · 언론

                  고 구릉지의 아주 척박한 곳만이 맥류를 재배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콩은 여름작물로서 당시에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1923년 작부면적은 9천3백70정보였고 수확고

                  는 5만6천 석이었으며, 단보당 생산량은 5백98합이었다. 당시 수원 인근지방에서 생산되는 콩은 영
                  양분이 많아 그 품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일본의 오사카, 도쿄 등에 수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 병충해 방제를 위해 1930년대 후반부터 제충국제와 석회유황합제 등의 농약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벼에 이화명충과 도열병, 그리고 맥류에는 깜부기병 등의 발생이 아주 심하

                  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산미운동을 재개하였다. 1939년 한국의 대흉작과

                  농촌 장정들의 징병과 징용에 의한 농촌노동력 부족 등으로 식량의 부족 현상이 일본과 한국에서 동
                  시에 일어나게 되었다. 제3차계획에서는 토지개량보다 자금이 덜 투입되는 농사개량에 치중하였으

                  며 단위면적당 생산량 증가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1908년에 4천3백34명이던 증산요원을 1941년
                  에 1만 명 정도로 늘리고 시·군, 읍·면에 배치하여 일방적인 농사개량사업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이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관권이나 심지어 헌병까지도 동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표 10〉에서 알 수 있듯이 경지면적이나 수확량이 계속하여 감소하였다. 단위면적당 수확

                  량도 점차 줄어들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중일전쟁 발발로 비료공장이 군수공장
                  으로 전환되면서 비료공급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3차 산미증산계획이 1940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출발하였으나 세계2차대전 종전과 함께 종료되었기 때문인데 이렇게 생산량이 감
                  소하자 미곡이 크게 부족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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