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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많은 농가들이 한우를 많이 사육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가축시장의 매매중개는 축산동업조합이 중개인을 지정하여 종사하게 하였다. 1922년 4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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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량은 수원시장이 제일 많았고 다음이 오산의 우시장(牛市場)이었다. 당시 아주 먼 거리에서 오산
산업
우시장으로 거래를 하기 위해 몰려드는 소들을 먹이고 재우는 마방간이 생겨났으며 1960년대까지 운
영하였다. 이곳이 지금까지 마장터로 불릴 만큼 오산지역의 가축사육과 거래가 번창하였음을 알 수 · 경제
있다. / 보건
돼지는 예부터 관혼상제에 수요가 많았던 가축이나 대부분이 재래종으로 농가마다 2~3마리 정도 · 환경위생
씩 사육되어 오다가 1920년대부터 개량종 버크셔, 요크셔 등을 보급하고 농가부업으로 적극 장려한
결과 오산을 비롯한 수원지역이 우량돼지의 생산지로 인식되어 각 지역으로 반출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양계업도 이때 급속히 발전되어 1914년 양계조합이 조직되고 채란채육의 개량종보급에 역점 · 사회복지
을 두었으며, 모범사육농가에는 우량계를 예탁하고 기술지도담당자를 두는 등 축산장려정책에 의해
오산을 포함하여 수원군이 유명 계산지(鶏産地)가 되었다. 닭은 우리나라의 농가 부업으로 가장 간단 / 사법
한 가축이어서 전국 각지로 빨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수원군은 축산동업조합을 통하여 종란과 종 · 치안
계를 전국에 판매하여 양계산지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24년 11월 2일에는 수원양계조합의
가금품평회를 오산에서 개최하였으며 그만큼 오산지역이 양계를 많이 하였다. · 소방 · 언론
(4) 잠업장려 정책과 양잠실태
잠업은 지도사업이 가장 먼저 시작된 분야로 1900년 잠업시험장이 설립되어 개량잠업기술에 대
한 훈련을 실시하기 시작한 이래 1905년 양지(陽地), 소사(素砂) 등 4개소에 잠업전습소를 설치하여
6~12개월간의 강습을 실시하였는데 1911년에는 79개소에서 졸업생이 1천9백60명에 달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13년 5월에 청호면(현재 오산시)에는 오산양잠조합을 설립하였고 그 후 오산
지역에 오산공립농업보습학교와 오산공립농잠실수학교를 설립하여 농업은 물론 양잠기술의 보급과
생산을 독려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당시 오산지역에도 양잠업이 상당히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남아 있는 정확한 기록물이 없다.
그러나 1930년을 전후한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1930년대 초반에 불어 닥친 농업공황은 일본 전체
의 경제에 막심한 타격을 주어서 농촌경제는 파멸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한국도 이러한 영향을 받
아서 농업은 침체상태에 빠졌고 특히 일제는 전시이기 때문에 통제적인 시책을 강화해갔고 잠사업도
점차 전시 산업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양잠의 불황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양잠소작제도가 시행되었는데 경기도는 이미 1919년부터 양잠모범지구라고 불리는 지역에
서 양잠에 이해가 있는 지주로 하여금 이것을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1942년 3월부터 조선잠사업통제령을 공포하고 이 법령에 따라서 고치 값을 공정가격 제도
로 바꾸고 고치의 판매는 공출제도로 변경하여 시행하였다. 이것은 당국이 양잠농가에 일정한 양의
고치를 할당하여 강제로 판매하게 하는 제도인데 항상 그 할당량이 과중하여 공출 양을 채우기에 많
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 양잠농가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러한 강제 공출의 영향은 광복 후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