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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문하고 경작규모가 더욱 영세화되었다.
해방 당시 한국농업은 전형적인 미맥 위주의 농업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미곡의 식부면적은 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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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제외하고는 1백50~1백70만 정보로서, 그 비중은 전체 작물 식부면적의 27% 내외에서 해방
산업
후에는 30~40%로 늘어났다. 대두, 소두, 녹두, 땅콩, 채두, 완두 등 두류의 식부면적은 1915년 이래
1백10만 정보 내외였으나 1940년 이후 80~90만 정보로 줄었으며, 그 비중 또한 16~19%에서 14% 수 · 경제
준으로 줄었다가 해방 후 곧바로 10% 이하로 줄었다. 미곡, 맥류, 잡곡, 두류 등 식량작물의 식부면 / 보건
적은 일제 초에 전체 작물재배면적의 90% 이상이었다가 그 비중이 줄어들어 1944년에는 85%였으며 · 환경위생
해방 후에는 80% 이하로 줄었다. 이에 반해 무, 배추, 고추 등 채소류와 면화, 아마, 대마, 저마, 인삼
등 특용작물의 재배면적이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그 비중은 전체 작물재배면적의 10% 내외에 지나지
않았다. · 사회복지
3) 식량증산 정책 / 사법 · 치안
광복 직후 제기된 또 다른 농정과제는 식량문제의 해결이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식량문제가
기아수출(飢餓輸出)로 인한 식량부족이었다면 해방 직후의 식량문제는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식량부족 · 소방
이었다. 군정기간을 거치면서도 식량사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아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나 보릿고개가 · 언론
연례적으로 반복되어 국민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물가는 계속 치솟아 식량 확보가 가
장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그래서 미 군정 당국이 서둘러 1948년에 체결한 한미경제원조협정으로 원
조물자 도입이 활발해지고 농작물도 수년 동안 풍작을 이루었고 정부의 미곡 수출억제조치 등으로
다소 안정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로 농산물생산은 감소되고 물가는 다시
치솟게 되어 쌀의 수입의존도가 70%에 이르다 보니 농업정책의 중점을 식량작물 증대와 수출산업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광복 후 이렇게 식량사정이 어려웠던 까닭은 관개시설의 관리부실, 비료와 농약, 농기구를 비롯한 농
자재 부족과 생산기술의 낙후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식량생산이 턱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인데 국내 경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식량작물의 단보당 수확량은 현재 수준의 1/3~1/4에 지나지 않았다.
표 14. 광복직후 곡물생산 실태
(단위 : 천석)
구분
미곡 맥류 잡곡 두류 서류 합계
연도
1945 12,836 2,483 571 1,011 1,335 18,235
1946 12,050 4,126 568 1,086 982 18,813
1947 13,850 3,714 441 1,000 1,034 20,039
1948 15,486 3,915 594 1,118 1,133 22,246
1949 14,607 5,055 863 1,469 1,239 23,359
〈자료 : 수원시사 1986. 한국농정50년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