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오산문화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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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VOL. 63 osan culture
회록’ 등을 낭송했습니다. 제가 낭송한 시 가운데 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
‘새로운 길’과 ‘자화상’은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 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며 식민지의 자
신 윤동주시인의 장례식에서 낭송되었던 시였습니 식임을 자책하면서도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
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내면서 ‘시인’으로 기억 거운 날에’라는 구절을 통해 독립을 확신하고 있
하기 위해 자식이 지은 시를 장례식에서 낭송하는 었으며, 일본유학시절에 쓴 ‘쉽게 쓰여진 시’에서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명백히 일제를 부정
하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밀고 시대처럼
올해는 윤동주시인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고 하며 독립에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윤동주시인을 순결한 영혼 대한 확고한 의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을 지닌 순수시인, 서정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 남의 나라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태어나 한 번
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더해 암울했던 일제 강 도 경험할 수 없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시’라는
점기하에서 민족혼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조국독 무기로 저항한 윤동주시인은 어느 독립운동가 못
립을 위해 저항했던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이었 지않은 독립투사였습니다.
다는 사실도 기억해야합니다. 윤동주시인은 28년
이라는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 윤동주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아직도
한 열망과 의지를 한 순간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며,
그것은 윤동주시인의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할 역사왜곡과 다시금 군국주의를 꿈꾸는 일본을
수 있는데, 윤동주시인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 바라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
에 따라 우리말을 못 쓰게 했던 그 엄혹한 시절에 를’ 바랐던 윤동주시인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도, 단 한 편도 일본말로 시를 쓴 적이 없었습니 별빛 맑은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가서 다시 그 분
다. 특히 그의 시 ‘참회록’을 보면 ‘파란 녹이 낀 구 의 시를 낭송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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