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2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P. 132

1907년  세워진  오산교회는  오산  최초의  감리회  교회이다.  교회  안에  오산  최초의

                  남녀  교육기관인  초등학교를  열었다.
                    애국계몽운동,  교육운동과  함께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오산지역에  의병활동은
                  드높은  것이었는데,  1907년  오산역  습격,  1908년  3월  원동  일본인  마을을  습격하
                  며  일본인  살해,  1909년  문시면의  의병장  안춘경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오산정미소,  오산우편소,  오산농협실수학교,  오산금융조합

                  등  근대성을  띤  많은  기관을  오산에  세웠다.  그것이  다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면
                  이  있었으나,  그것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한
                  국인의  성장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이  되면  오산  지역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다.  3월  14일에  시작되고  3
                  월  30일에  끝났는데,  오산장날(당시는  음력  3,  8일에  장이  열렸음)인  3월  29일에
                  대대적으로  오산장  중  우시장에서  이루어졌다.

                    1917년  당시  성호면  오산장은  연간  거래액수가  17만  4,000원이었고,  수원성내장,
                  수원성외장은  평균  16만  5,000원이었다.  오산장은  남양장,  발안장,  반월장,  사강장
                  및  수원성  내외장을  모두  포함하여  가장  거래규모가  큰  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점차  쇄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오산장은  100년  전통으

                  로  홍보하는  오산오색시장과  문헌상  최소  260년이  넘는  전통의  오산(오매)장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오산오색시장은  고객이  밀려다닐  정도로  마켓  기능을  넘어
                  관광형  형태의  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경기  남부의  가장  큰  시장이  되었다.  오
                  산장터는  현재  재정비에  들어가  새롭게  전통과  젊음과  예술이  공존하는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게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며,

                  동시에  우리  민족도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광복은  우리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어서,  남쪽에는  자본주의인  미국이,  북쪽에는  공산주의인  러시아연방
                  인  소련이  진주하여  남북이  분단되는  계기가  된다.  패망한  일본이  아니고,  한국이
                  분단되는  아이러니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우리  민족은  고착화된  상황을  맞이하

                  게  되며,  지금까지도  남북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에서  유엔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정부가  수립되며  대한민국이  탄생한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공산주의로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무력  기습  전면전을  일으킨다.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는  변변한  대비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6·25한국전쟁으로  빨려  들어간다.  유엔은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을
                  구성한다.  1950년  7월  5일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  스미스전투부대  540명이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과  최초로  교전한다.  이  전투로  인해  150명이  사망하고,  31
                  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이날  갈곶동에서는  한국군이  인민군과  교전하는
                  데,  두  교전에서  병력과  화력이  부족한  미군과  한국군은  퇴각하고  만다.  비록  전투
                  에서는  적을  제압하지  못했으나,  일방적으로  전세가  밀리던  상황을  지연시키는  역

                  할을  해  이후  낙동강  전투를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큰  성과를  낸  전투가  되었다.  우




                                                           132
   127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   136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