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P. 61

화책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제2의  왕도격인  신도시를  현  수원시에  건설하여  군사와  경제의  강화를  도
                  모하여  정치적인  힘을  키우고자  했다면,  현  오산시  궐동(당시  중규면)에  공자  사당
                  인  오산화성궐리사를  개설한  것은  이곳을  조선  유림의  총  본산으로  만들어  유림들
                  로  하여금  공자의  충(忠)  사상을  통해  그들의  단합된  힘을  정조  자신에게로  집중케
                  하는  것이  왕권  강화를  위한  실질적  대책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선의  백성,  즉  자신의  백성들  삶을  책임지는  따뜻한  왕권의  단초라  여겼던  것이
                  다.
                    이러한  의중을  담고  정조는  경기  감사에  명해  공부자의  성문을  보수토록  하고  공
                  자가  살았던  중국  노나라에  있는  궐리사를  본떠  사액하고  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
                  촌의  동명을  궐리로  개칭케  하니  이로부터  오산화성궐리사란  공자의  성묘가  이  땅
                  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화성궐리사  은행나무,  수령이  근  500년(470년)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신도시  조성  계획을  위해  1794년  화성성역사업을  착수하기  2년  전인  1792
                  년(정조16년)에  수원(화성)  고적을  탐사하였는데,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이  중종  때
                  경기·황해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기묘사화의  명현으로  이름난  공서린이  낙향하
                  여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의  유허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오산화성궐리사를

                  개설하기  위해  공자의  후손을  우대하는  방안을  마련하라  지시하고  공서린에게  문헌
                  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1792년  당시  기백은  왕의  전교를  받고  화사를  보내  문헌공의  옛터와  서재,  그리고
                  우물을  도형하고  새로  자라나는  은행나무를  그려  갔으며,  같은  해  10월  7일  화성부

                  사가  비장을  파견해  정당의  방위를  자좌(子坐,  북쪽을  등지고  남쪽으로  건물을  배




                                                           61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