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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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학교비(鳳鶴橋碑)
봉학교비는 양산동 508번지 3에 소재했으나 현재는 한신대박물관에 보관 되어있다. 연대
는 조선 명종 19년(1564)3월이며, 사각원수(四角圓首)형 비석으로 전면 200여 자가 각자
되어 있고, 후면은 마모가 심하여 확인 불가능하다. 오산시 향토문화유적 1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6년 11월, 오산시 양산동에 거주하고 있는 문진영씨가 황구지천 옆 제방 아래(양산동
484-6제)의 밭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비석인 사실을 모른 채 보관하던 중 한신대학교 박물
관에서 세람교지 현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비석 네 면에는 모두 2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전면 우측에 ‘…부봉학교(府鳳鶴橋)’
라는 글자가 확인되어 봉학교비라 명명되었다. 전면은 상하 2단으로 나뉘는데, 상단 8줄과
하단 9줄에 17명의 시주자(施主者)의 명단이 새겨져 있으며, 글자 크기는 3×2.5㎝(가로×세
로)부터 6×5㎝(가로×세로)까지로 일정하지 않다. 좌측면에는 화주(化主) 2명과 석수 1명
의 이름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으며, 우측면에는 가정 43년 갑자 3월이라는 연도가 쓰여 있
고 상하 2단, 각 5줄로 병조참지를 지낸 홍천민(洪天民)을 비롯한 10명의 시주자 명단이 새
겨져 있다. 후면은 마모가 심하여 명문의 확인이 불가능하다.
봉학교의 존재는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황구지천의 세람교가 있었다는 위치와 비
의 출토위치가 매우 가깝고, 근거리에 2개 이상의 석교가 있기 어렵다는 점, 조선시대 제5대로
(大路)인 제주로에 위치한 다리이므로 가까운 위치에 별개의 다리가 있거나, 있었으면 문
헌에 기록이 남지 않을 리 없다는 점, 세람교라는 지명은 조선후기에만 등장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봉학교는 조선 전기 세람교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비석은 봉학교가 과거 홍수 등 어떤 이유에 의해 훼손된 이후 당시 병조참지였던 홍천민과
승려의 주도로 시주자의 시주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인근에 사찰이 있었
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봉학교비의 최초 발견지가 건립지와 일치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세람교지와 인접된
점으로 보아 원위치는 발견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람교는 고지도에 기록되어 있어 예전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정확한 구조와 성
격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었다. 주변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도 백사
장 옆에 부분적으로 잔존해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 시 교각부재를 일부 뜯어와 활용했
다고 한다. 그 후 황구지천 호안공사 시 공사 시행자가 나머지 교각석 수 트럭 분을 무
단으로 채취해 갔다고 한다.
세람교지는 서수원-오산-평택 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에 따른 안녕IC구간 교량공사 중 건축
물의 일부로 여겨지는 석재가 노출되었다는 공사담당자의 연락을 받고 한신대학교박물관
이 문화재청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2006년 4월 15일부터 5월 9일까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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