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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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오산청학동유적 등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의 생활 유적이 발굴되어 오산
은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유물로 확인된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로는 가장동유적에서 주거지 1기, 구상유구 2기 및 수혈 9기
가 각각 조사되었다. 이들 세 종류의 유구들에서 두형토기 및 우각형파수가 공통적
으로 출토되어, 이 지역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
다.
최근 다수의 분묘들이 수청동에서 발굴되었는데 적어도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이
일대에 중요한 거점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오산 지역은 다른 경기도 남부지역이나 충청도, 전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낙랑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 후 2세기까지의 유적이 아직 제대로 발굴되
고 있지 않고 있으며, 앞의 수청동 유적의 분묘는 모두 3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삼국시대의 유물을 보도록 하자. 한반도 중부의 마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묘제가
사용되는데 주구를 갖춘 목관묘와 목곽묘(주구토광묘)가 발달한 지역은 천안과 아
산을 중심으로 한 곡교천 유역, 청주 중심의 미호천 유역, 그리고 공주-부여-대전
일대의 정안천 및 갑천 유역이다. 종전에는 이러한 묘제의 북한계를 천안이나 안성
일대로 보면서 안성천 유역을 주목하였지만 오산 수청동유적의 발견으로 인해 이러
한 기존 견해는 수정되었다. 연이어 용인 상갈동과 마북동에서도 이러한 분묘가 확
인됨으로써 현재 그 북한계는 용인-오산 일대로 북상하였다. 분묘의 형태만을 고려
할 때, 오산지역은 천안-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구목관(곽)묘 분포권의 일원이었
음을 알 수 있다. 수청동의 주구는 말발굽, 혹은 좌우가 긴 역U자형의 평면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다. 중간이 끊겨서 주구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육교부의 기능을 갖
춘 것과 낮은 쪽을 제외하고 삼면을 완전히 주구로 돌린 부류가 공존한다. 묘광의
방향을 보면 수청동의 경우 대부분 등고선과 직교하게 묘광을 굴착하였는데, 주구
의 평면 형태와 함께 이 유적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수청동유적의 무덤들이 조성된
시기는 3~5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구조적 변화 양상이 그리 뚜렷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수청동 유적을 남긴 세력은 오산은 물론이고 안성, 용인, 화성 등 경기 남
부에서 성장하던 마한 정치체 중 비교적 높은 위상을 지닌 세력임을 알 수 있다. 5
세기 대에도 계속되는 고분의 연속적인 축조는 이 정치체의 지속 기간이 길었음을
보여준다. 수청동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서울의 백제국 중심의 제국연합보다는 오
히려 천안-청주 지역의 제국연합과 문화적으로 동질적이다. 분묘 유물은 백제 중앙
에서 만들어지거나, 혹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중앙을 거쳐 수청동고분군에 부
장된 물품도 있고, 이것과는 달리 백제 중앙의 영향을 띠고 있지만 재지에서 제작
된 것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직구단경호이다.
고구려 고분은 봉토를 크게 쌓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육안으로 발견하기 어렵지 않
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는데, 아직 오산 일대에서 고구려 고분이 발견된 예는 없
다. 하지만 성남-용인-화성과 충주를 잇는 범위에서 고구려 고분이 발견되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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