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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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앞으로 오산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6세기 중엽 이 일대가 신라의 영토로 된 이후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편인데, 독산
성 유적과 양산동 유적을 들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독산성은 오산 일대에서는
가장 중요한 관방유적으로서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신
라 토기편이 출토되어 그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은 독산
성의 북쪽, 황구지천에 접한 산록 완사면에서 발견된 양산동유적, 그리고 독산성의
남쪽 얕은 구릉에서 발견된 지곶동 석곽묘이다. 이 시기에 속한 생활유적으로서는
가장동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가감이산의 남쪽으로 뻗은 2개의 구릉 사이의 곡간
부에 형성되어 있다. 원삼국에서 백제에 걸친 유적과 신라 유적이 모두 발견되었다.
유적 중심 시기는 신라, 특히 6~7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곡간부 중앙을 흐르는 자
연 수로를 중심으로 삼아 각종 수리관개시설이 인접하고 조금 떨어진 주변의 사면
부에 주거지와 수혈이 배치된 양상인데, 수리관개시설은 호안시설, 물막이 및 배수
시설, 목주열, 저수시설 및 성격 미상의 유구 등 다양하다. 이는 당시 자연 수로를
흐르는 물의 이용이 매우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주거지는 한 변의 길
이가 3~4m 정도의 부뚜막 달린 것들이 많다. 부뚜막의 위치는 수혈 내부에 있는
것과 외부에 있는 것으로 양분되는데 통일 이후 후자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 전국
적인 현상이다.
수혈 유구의 경우 한성백제기의 것은 평면 원형이 압도적인 데 비해 신라의 수혈
유구는 타원형과 장방형이 공존하며 규모는 작아지는 경향성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가수동의 신라 취락은 자연 수로를 중심으로 유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20여동의 고상건물군, 밭, 베 짜는 도구와 추, 어망추, 목제 수레바퀴 등의 유물을
통해 볼 때, 농업 및 어업 생산과 물품 보관, 유통 등이 이루어졌음을 상정할 수 있
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무덤은 지곶동, 가장동, 금암동에서 발견된 횡구식 석관묘
를 들 수 있다.
결국 오산 일대에서 신라 고분은 지곶동, 금암동, 가장동 세 군데에서 발굴, 조사
된 셈인데 유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아직 정식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상세
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결국 신라시대의 오산 지역 생활 모습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독산성을 비롯한 신라의 관청, 생활, 관방유적, 그리고 무덤과 생산유적 등이 종합
적으로 조사되어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 유물로 보는 오산은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는
유물뿐만 아니라 기록으로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기
록이 풍부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행정주체가 되지 못하다 보니 오산만의
기록이 거의 없다.
2. 문헌으로 본 오산시의 역사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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