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오산문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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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VOL. 64 osan culture
고 절개를 지키다 돌아간 분들의 영정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한편, 선비들이나 서생들
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율곡 이이(1536~1584)도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해주문헌서원의 원장이 되어 학규를 제정하
기도 하였다. 현종14년(1673)에는 관찰사 윤곡이 조정에 청원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다가 중
수를 하기도 하였다. 철종13년(1862)에는 이유원(1814~1888)에게 비문을 받아 사원 뜰에 세울
묘정비를 건립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고종8년(1871)에 훼철되었다. 그 이
후 서원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후손들이 서원지에 사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
고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남북이 분단까지 됨으로 인해 남한에 사는 후손
들은 북한에 있는 사당에 찾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최충선생의 사당 영정각 측면
1985년 최충 탄신 1,000주년을 맞아 남한 지역 해
주최씨 후손들이 새로운 문헌서원 건립을 추진한
다. 선생의 14세손 최만리의 증손자인 최선의 묘소
가 있는 종산이 오산시에 있고, 지근거리인 성환에
국보 제7호 최충의 비문이 새겨진 사적비 봉선홍경
사비갈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인접 안성시에
는 선생을 봉향하고 있던 문헌서원 등이 있다. 현
재 남한에는 최충을 모신 서원, 홍주의 노동서원, 강진의 명곡서원이 더 있긴 하지만, 본거가
되는 곳은 해주의 문헌서원이므로, 여러모로 해주의 문헌서원을 대신할 수 있는 곳으로, 오산
이 입지라 생각하여 이곳에 오산문헌서원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오산문헌서원 전경. 현재는
영정각만 남아있다.
이곳은 해주최씨의 총본부로도 사용되었으나
오산세교신도시 개발로 문헌서원이 수용됨으
로 인해 현재는 영정각만 남게 되는 아픔을 겪
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영정각이라도 남아서
그중 다행이라 하겠다. 매년 4월 넷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원래 해주문헌서원의 모습으로 복원
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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