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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19세기 수원지역의 장시                                             137

                         임원십육지            화성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수원부지도(1872)            생활환경
                          (1830)          (1831)         (1851-56)           (1863년경)

                      장시명       개시일       장시명         장시명       개시일       장시명       개시일        장시명                 /  지명유래
                     북문외장        2·7
                    (北門外場)

                     남문외장        4·9     남문외장        남문외장        4·9     남문외장        4·9      남문외장
                    (南門外場)               (南門外場)     (南門外場)               (南門外場)              (南門外場)
                      오산장        1·6      오매장         오매장        3·8      오산장        3·8       오산장
                     (烏山場)               (烏梅場)       (烏梅場)               (烏山場)                (烏山場)
                                          팔탄장         팔탄장       5·10      팔탄장       5·10       발안장
                                         (八灘場)       (八灘場)               (八灘場)                (發安場)
                                          세람장         세람장        1·6      세람장        1·6
                                         (細藍場)       (細藍場)               (細藍場)

                                          석현장         석현장        1·6      토진장        1·6
                                         (石峴場)       (石峴場)               (土津場)

                                          안중장         안중장        2·7      안중장        2·7       안중장
                                         (安仲場)       (安仲場)               (安中場)                (安中場)
                                         사사곶장        사사곶장        4·9     사사곶장        4·9      사사곶장
                                         (沙士串場)     (沙士串場)               (沙士串場)              (沙士串場)






                    19세기 수원지역의 장시는 18세기와는 차이를 보인다. 읍내장이 세람장으로 변하였고 오타장이 폐
                  지 또는 흡수되었으며 신읍치에 남문외장과 북문외장이 신설되었으나 북문외장은 『임원십육지』 이외

                  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보아 북문외장은 남문외장으로 흡수되었거나 폐지되어 기록에
                                        15)
                  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수원지역 장시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화성지』 「재용」 조의 ‘각장세전’에는 각 장시
                  의 세액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남문외장이 309냥 6전, 오매장 309냥 6전, 석현장 157냥 8

                  전, 팔탄장 111냥 9전 6푼, 안중장 53냥 4전, 사사곶장 55냥 8전, 세람장 33냥 순이다. 이로보아 남문
                  외장과 오매장(오산장)이 당시 수원지역에서는 가장 큰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고종 6년

                  (1869년) 5월 각종 군병과 사령의 급료를 충당하기 위한 방안으로 수원의 전대방에서 300냥, 남문외
                                                                              16)
                  장 여각 4곳에서 120냥, 오산장 여각 1곳에서 30냥을 거둔 기록도 있다.  이로 비추어 보아도 오산장
                  은 19세기 이후 꽤 성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15) 이정일, 「정조시기 읍치 이전(移轉)과 수원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 『수원시역사문화연구 창간호』, 2011.
                  16) 이정일, 앞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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