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제1권
P. 56
정조(正祖) 16년(1792년), 임자(任子) 9월 3일, 중규면(中逵面) 구정촌(九井村)에 궐리사를 건축하라
는 명(命)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지금의 오산화성궐리사가 위치한 동네가 남촌동이다.
순조(純祖) 31년(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에는 어은굴리(漁隱窟里), 궁기리(宮基里), 대화
촌(大花村) 등이었다. 어은굴리에 오산천의 의미가 담겨 있다.
헌종(憲宗) 5년(1839년)에 발간된 『화성궐리지(華城闕里誌)』와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에는 삼미
면(三美面)과 중미현(中彌峴)이다.
광무 3년(189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는 어은굴리(漁隱窟里), 궁기리(宮基里), 대화촌(大花村)
으로 1831년의 행정지명과 같다.
일제강점기 1914년 4월 1일에 수원군 초평면 가장동(佳長洞), 죽전동(竹田洞), 궁대리(宮垈里), 청
학리(靑鶴里)였다. 1941년 10월 1일에 수원군 오산면(烏山面)이 되었다.
1960년 1월 1일에 화성군 오산읍(烏山邑)으로 편성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 시 승격과 동시에 오산시 남촌동(南村洞)이 되었다. 당시의 오산 5리와 오산 6리
(남촌), 청학리(점촌), 가수동 일부, 궐리사를 포함한 권리 일부(대호밭과 궁터), 가장리(가장골과 구
래밭)의 13동 62반을 통합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원 일본인 요시다에이사부로(吉田英三郞)가 쓴 『조선지(朝鮮誌)』에 의하
면 당시 오산역 부근에는 내지인 1백여 명, 조선인 1천1백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한다. 이 기록으
로 보아 지금의 남촌동은 경부선철도의 개통으로 급격히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4월 1일, 수원군 성호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1년 10월 1일 다시 오산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0년 1월 1일, 화성군 오산읍으로 편성되었다. 1989년 1월 1일, 오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옛 지
명을 되찾았다.
오산시 남촌동은 오산대학교, 오산중·고교, 오산여중·고 등의 교육기관이 몰려 있다. 장차 오산
시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무한 발전이 기대되는 동이다.
1) 가장동(佳長洞)
가장동은 가장골이라 불리던 지명을 표기하면서 가장리(佳長里)라 부르게 되었다. 그 뜻은 ‘가장자
리’라는 뜻이라 하는데 오산천을 따라 들어선 마을이 길고 주위가 아름다워 가장(佳長里)리가 되었다
고 전한다. 최근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자족도시로서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오산시사
2) 궐동(闕洞)
궐동은 오산화성궐리사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제
1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리였다.
권
오산화성궐리사가 세워진 것은 정조(正祖)의 화산릉행차(花山陵行次)에서 비롯되었다. 화산릉 참
배를 마친 정조가 오산 들을 바라보니 수많은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정조가 이 일을 기이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