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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모든 것이 도백과 본 고을에서 조치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마련하는 데는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을의 근방에다가 한 달에 시
장을 여섯 번 세우고 한 푼이라도 절대 세를 거두지 말고 단지 서로 장사하는 것만을 허락한다면, 사
방의 장사치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모여들어서 전주(全州)나 안성(安城) 못지않은 큰 시장이
형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은 저절로 살림에 재미를 붙일 것이고, 비록 다른 고을의 백성
들이라도 필시 모아들이기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제 발로 찾아올 것입니다. 만약 고을의 모양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수원부양책과 더불어 도시의 성장을 이끈 것은 바로 화성(華城) 축조였다. 화성은 정조 18년 2월에
착공해 2년 6개월이라는 기간을 거쳐 20년 9월에 완공되었다. 착공에 동원된 연인원만 해도 약 37만
6천 명, 소요경비는 돈 87만 3520냥과 곡식 1500석이었다. 이후 정조는 수원 거주 상인들에게 관모
와 가삼판매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등 수원을 상품유통의 중심지로 활성화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
였다.
수원은 읍치 이전(移轉), 화성의 축조, 도로의 정비 등으로 이전과는 다르게 변모하였다. 신읍치 시
기 수원에는 북문외장과 남문외장을 포함해 모두 9개의 시장이 개설되었다. 이들 시장명은 오산장,
안중장, 오매장, 석현장, 사사곧장, 팔탄장, 세림장 등이었는데 장이 열리는 개시일이 겹치지 않도록
했다.
특히 오산장을 포함한 수원장은 지역의 각종 물자들이 집결되어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는 중간 경유
지로서의 중요성이 강화되었기에 성장의 속도가 빨랐다. 수원장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서울, 서쪽으
로는 남양, 동쪽으로는 용인, 남동쪽으로는 양성과 안성, 남쪽으로 평택으로 연결이 되는데, 서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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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외의 관계망은 화성 건설 이후 새롭게 형성된 것으로 읍치 이전으로 인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장시들은 모두 삼남(三南)과 서울을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더욱 긴밀하게 연계되고 활성
화될 수 있었으며, 오산장을 포함한 수원장은 상업의 요충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원의 장시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의 하나로는 가까운 거리에 개설되었던 안성장
의 영향도 크다. 당시 안성장은 삼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상품이 거쳐가는 길목에 있어 수원장보
다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수원은 삼남-안성-서울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상품거래가 활기
를 띨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화성(華城) 축성 후 둔전(屯田)을 경영하면서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
오산시사 를 나누어주었기에 소가 증가하게 되었고 이를 팔기 위한 장소가 필요해졌기에 자연스럽게 우시장
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후 수원의 우시장이 전국 3대 우시장으로 성장하게 된 배
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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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14) 수원시, 『수원시사』, 2014.